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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비록(祕錄)
[김동식 기획연재]<3> 1983년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 치적 과시용
대담한 리더십 과시·전두환 대통령 제거로 남한 민중봉기 노려
김일성 “과격분자 소행으로 하자”에 김정일 “무조건 오리발”
미얀마서 北소행 밝혔는데 北 아직도 “남조선 인민 의거”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07 06:30:34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김일성의 후계자’라는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은 김정일은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일은 국가와 인민을 위해 특별히 해 놓은 것 없이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을 세습했다는 컴플렉스를 스스로도 알았는지 여러 측면에서 치적을 과시함으로써 자신도 김일성 못지 않은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이러한 김정일이 자신의 치적 과시를 위해 우선적으로 추진한 것이 김일성의 혁명 활동 업적을 기린다며 전국 도처에 건설한 우상화 건축물이다. 대표적으로 김정일은 1970년대 초반 평양 만수대 언덕에 어마어마하게 큰 김일성 동상을 세우는가 하면 왕재산혁명전적지와 백두산혁명전적지 그리고 주체사상탑과 개선문·김일성경기장 같은 김일성 우상화 건축물을 가는 곳 마다에 건설해 놓았다.
 
김정일이 지시해 건설해 놓은 김일성 혁명사적관과 박물관·연구실 등 우상화물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우상화 건축물들은 북한 주민들에게만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북한 내부의 건설 역량으로도 충분히 설계와 시공이 가능했다. 실제로 김정일은 1970년대 중반부터 많은 인력과 장비·자금을 투자해 수많은 우상화 건축물들을 건설해 놓았다.
 
그러나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에게 문화예술, 특히 영화 분야에서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북한 내부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김정일은 이미 중앙당 선전선동부 영화 및 문화예술 담당 부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북한의 영화계가 촬영 장비는 물론 연출과 배우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세계적인 추세·수준에 많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북한 내부의 역량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김정일에게는 자신의 그 모든 욕망을 실현시켜 줄 역량이 이미 확보되어 있었다. 그 역량이란 바로 김정일의 명령 한마디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그것도 시뻘건 대낮에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던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와 감독을 납치해 오는 것은 물론 하늘의 별이라도 따 오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충성스러운 대남 공작조직과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호전적인 심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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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남 공작기관 간부들은 1970년대 후반 김정일이 후계자 신분으로 대남 공작기관을 장악한 다음부터 그의 신임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죽음을 동반하는 일이라도 결코 마다하지 않고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1977~78년 북한 대남 공작부서의 하나인 중앙당 조사부에서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에게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최은희와 그의 전 남편이자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었던 신상옥을 백주에 홍콩에서 납치해 ‘선물’로 상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북한 대남 공작부서 간부들은 시간이 갈수록 ‘김정일에게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 일’이라면 전쟁도 불사할 태세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와 같이 북한 대남 공작기관 간부들의 충성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1980년대 초반 그들이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바로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즉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 사건이다.
 
당시 북한 대남 공작기관 간부들이 1983년 10월9일 발생한 아웅산묘소폭파 사건을 자행한 목적, 즉 전 대통령을 암살함으로써 얻고자 한 것은 대략 두 가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연히 김정일의 폭력적인 취향을 만족시켜 주고 치적을 세워줌으로써 그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김정일로서는 전 대통령에 대한 암살 작전이 성공할 경우 그것을 자신의 통일 업적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자신이 대담하고 용기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북한 대남공작기관 간부들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은 ‘전두환’이라는 군부독재자가 지배하는 일인 독재국가이고, 따라서 독재자(전두환)만 제거하면 곧바로 민중봉기가 일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사회민주화가 실현될 것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북한 대남 공작지도부 간부들은 당시 남한도 북한과 같은 일인 독재국가라는 인식하에 독재자만 제거하면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 사건은 단순히 전 대통령 제거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이 아웅산묘소폭파 사건을 통해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 한 것은 당시 남한에서 극렬하게 전개되고 있던 반미·반정부 투쟁을 더욱 고조·확산시킴으로써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대한민국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노동자·농민·청년 학생 등 ‘대남 혁명의 주력군’이 주도하는 민족 자주 정권을 수립하거나 적어도 민족 자주 정권 수립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최고지도부의 이와 같은 인식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싹트기 시작하여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에 의한 1.21 청와대습격기도 사건이나 1970년 6월 현충문 폭파 사건, 1974년 8월 문세광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또는 육영수여사피살 사건)과 1983년 10월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 사건까지 모두가 지도자(박정희·전두환) 1명만 제거하면 대한민국이 곧바로 붕괴되고 민주화될 것이라는 북한 최고지도부의 인식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 1983년 10월 9일 북한의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으로 중상을 입은 한 수행원을 현지 경찰이 구조하고 있다. 이 천인공노할 테러로 서석준 당시 부총리‧이범석 외무장관 등 17명의 외교사절이 순국하는 대참극을 빚었다. 연합뉴스
 
 
지도자만 제거하면 대한민국이 붕괴할 것이라는 북한 지도부의 인식은 남한에서 선거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기 시작한 1987년 노태우정부 시절에 이르러 ‘대통령을 제거하더라도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다’는 인식으로 비로소 바뀌게 되었다. 
 
실패한 전두환 대통령 암살 작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김정일의 직접적인 명령하에 당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김중린과 인민무력부장 겸 총정치국장 오진우를 비롯해 인민무력부 정찰국 간부들이 비밀리에 전두환 대통령 암살 작전을 계획하고 치밀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렇게 얘기하면 정말 김정일이 직접 전 대통령 암살작전 지시를 하는 걸 봤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북한에서 대남 공작과 관련한 사안에 대해서는 단순 대남 침투와 같은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최고지도자(당시에는 김정일·현재는 김정은)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은 후에만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그러니까 김일성이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1.21 청와대기습미수 사건을 염두에 두고 ‘군부의 일부 좌경 모험주의자들이 보고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감행했다’며 유감을 표시했다든지, 2002년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대남 공작 부문의 일부 과격한 자들이 감행한 사건’이라고 언급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떠벌인,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는 것이다.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 사건은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감행하는 작전이므로 자칫하면 남북 간의 전쟁으로까지 확전될 우려가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민감하고 중차대한 공작을 김정일의 지시 없이, 김정일에게 보고하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명령을 받은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미얀마를 방문하는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로 결정한 다음 직접적인 암살 작전은 인민무력부 정찰국에서 담당하고, 암살 장소까지 테러 요원들을 안전하게 이동·침투시키는 임무는 임호군의 중앙당 조사부가 담당하기로 하는 등 역할을 분담했다.
 
이에 따라 인민무력부 정찰국에서는 소좌 김진수(일명 진모), 상위 강민철(본명 강영철)ㆍ신기철(본명 김치오) 등 3명을 선발해 침투 및 폭파 훈련을 실전과 같이 진행하도록 한 다음 임무 수행에 투입했다.
 
중앙당 조사부에서는 일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 소속 재일교포가 기증한 상선 ‘동건애국호’의 비밀 객실에 테러범 3명을 승선시킨 후 랑군 부두를 통해 미얀마(당시에는 버마) 에 무사히 상륙, 침투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북한에는 동건애국호와 함께 수근호·승리호·염분진호 등 재일동포들이 애국의 마음을 안고 매입해서 기증한 상선이 여러 척 있었는데, 이 상선들은 모두 대남 공작부서인 중앙당 조사부가 운영하면서 공작원들을 상선에 몰래 태워 일본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침투시키는 등 대남 공작에 활용하고 있었다.
 
1983년 9월17일 중앙당 조사부 소속의 5000톤(t)급 상선 ‘동건애국호’를 타고 랑군 부두를 통해 미얀마 침투에 성공한 정찰국 특수요원 3명은 은밀히 미얀마 주재 북한대사관에 숨어 들어가 잠복했다. 그리고 테러 3일 전인 10월6일 아웅산묘소에 접근해 현장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한 후 북한에서 미리 가지고 간 폭발물을 건물 천장에 설치했다. 이들은 그다음 3일간 근처에서 노숙하면서 대기하다가 10월9일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춰 원격조종장치를 눌러 폭발물을 폭파시켰다.
 
이 테러로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각료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미얀마인도 4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을 입는 등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 사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과 사건 발생 이후 한국 정부가 취한 입장과 조치 등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다만, 당시 미얀마의 경우 테러 사건 발생일로부터 25일이 지난 1983년 11월4일 자신들이 검거한 테러범이 북한군 특수요원임을 밝혀 내고 “범죄 집단인 북괴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북괴 정권의 승인 자체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대한민국에 위로 및 사과 사절단을 보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당시 암살 작전에 투입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요원 3명 가운데 1명(신기철)은 체포 작전 과정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되었고, 2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2명 가운데 1명(김진수)은 자국 국가원수 및 우방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을 시도할 경우 사형에 처하는 미얀마의 형법에 따라 1985년 4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머지 1명(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그로부터 25년 후인 2008년 5월18일에 중증 간질환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강민철이 사망하기 6개월 전인 2007년 말 북한과 미얀마 간의 외교 관계가 복구되었다는 점에서 물증은 없지만, 북한의 과거 행태로 볼 때 북한 대남공작부서가 강민철 사망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북한은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 사건에 대해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독재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던 남조선인민 스스로의 의거이지 우리(북한)가 개입한 게 아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강민철은 공화국의 인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인민”이라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1997년 한국에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에 의하면, 미얀마 아웅산묘소폭파 사건 당시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동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상호 대립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김일성이 예전의 1.21 사태 때와 같이 “부하들 중 일부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했으나 김정일은“절대로 안 된다. 무조건 부인해야 한다”며 강경하게 반대했고,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반영되어 북한이 끝까지 오리발 모드를 견지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가 북한에서 15년간 남파 공작원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김정일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다.
 
 
◆김동식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년 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년 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 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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