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안기부 정보학교 입소… 정식으로 정보기관원이 되다
1993년 1월 10일, 나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정보학교에 입소했다. 한겨울이었다. 내가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고, 정식으로 정보기관원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이후 1998년 3월,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개명되고 정보학교는 그 후 정보대학원으로 승격되었다.
입사하기 전에도 인성검사다 뭐다 하며 몇 차례 드나들긴 했지만 막상 정식 요원이 되어 들어가니 기분이 달랐다. 청사 내에 줄지어 서 있는 곧게 뻗은 소나무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보였다. 텅 빈 운동장에 누렇게 변색된 잔디가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당시엔 안기부 청사가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해외와 대북 정보를 담당하는 부서들은 이문동 청사 내에 있었다. 물론 우리가 입소한 정보학교도 이문동에 있었다. 이문동 청사는 행정구역상 동대문구 석관동에 속했으나 통상 이문동이라고 불렀다.
1995년 안기부 청사 이전 후 정보학교도 경기도 성남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국내 정보 부서와 대공 수사‧외사 보안 부서들은 남산 청사에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편하게 이문동‧ 남산이라고 불렀다.
이문동 청사 자리는 중앙정보부(중정)의 2대 부장이었던 김형욱 씨가 헬기를 타고 직접 물색했다고 한다. 이문동 청사의 운동장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천연 잔디 구장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운동장은 예전에 중정의 축구팀이었던 양지축구단의 연습장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양지축구단은 “1968년 로마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했는데 김형욱 부장이 이에 자극을 받아 창설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정보기관이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썼는가 보다.
청사 내를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언덕에는 조선조 경종(景宗)과 그의 부인의 묘인 의릉(懿陵)이 아래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왕릉은 대개 풍수지리상으로 좋은 땅에 위치해 있다. 당연히 경치 또한 좋다. 봉분 아래에는 양지못이라고 불리는 인공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왕릉 아래에다 못을 팠다고 해서 이씨 종친회의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양지 못에는 서슬 퍼런 시절에 생겨난 코미디 같은 전설이 있었는데, 중정 시절에는 “양지 못의 금붕어를 관리하는 붕어 아비도 고향에 내려가면 군수가 직접 영접을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03정부의 정규 30기
내가 입소한 정보학교 교육과정은 정규과정 30기였다. 정규과정이란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1년간의 신입 부원 교육과정을 말한다. 이는 국정원의 기간요원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정규과정 출신들은 매년 엄격한 서류심사와 공개시험을 통해 선발된 자원들이다.
이들은 1년간의 고된 합숙 훈련을 통해 자연스럽게 강한 동질감과 연대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은연중에 국정원의 주인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강한 책임감을 갖게 된다. 매년 정규적으로 배출되다 보니 선후배 정서도 강한 편이다.
이에 비해 정규과정이 아닌 일반 공개채용 직원들은 비정규 또는 기본과정이라는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요즘은 정규과정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다고 한다.
정보학교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맞아 준 사람은 훈육관(訓育官)이었다. 훈육관은 우리의 일년간 교육을 전담할 사람이다. 우리 훈육관은 송경○이란 분으로, 정규과정 20기 선배였다. 그는 처음 우리 일행을 맞이한 자리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너희들은 03정부의 정규 30기다”고 일장 연설을 했다. 우리 기수의 입사를 김영삼 정권의 출범과 연관지어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했다.
첫인상과 달리 다정다감했던 송경○ 훈육관
우리 훈육관은 첫인상이 별로였다. 생김새며 목소리가 영 호감이 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첫인상과는 달리, 그가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나는 교육 기간 중이나 국정원 생활에 훈육관으로부터 과분한 애정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에 건너오고 난 후 아직까지 훈육관에게 변변히 전화조차 못했다.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훈육관은 교육생들과 긴밀히 교감할 수 있어야 하고, 정보기관이란 곳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입사 10년 차의 직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때부터 이런 전통이 깨졌다고 한다. 요즘은 12~3년 차 선배 기수에서 훈육관이 선발되는 모양이다. 훈육관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매년 선발할 때가 되면 어느 정도 경쟁 분위기가 형성된다. 대개는 해당 연도 동기회가 선거를 통해 품성이 괜찮은 동기를 그 해의 훈육관으로 추천한다.
훈육관은 보통 한 명이지만, 요즘처럼 입사 인원이 늘어나면 두 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때에는 여자 동기들을 담당하는 여자 훈육관이 한 명 있었다.
훈육관은 어렵고 힘든 자리이다. 교육 기간 동안에는 교육생들과 같이 지내야 하기 때문에 처음 몇 달간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백여 명의 인원을 지휘 ‧통솔하는 일이 간단치 않은 데다,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직접 일일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고달프기까지 하다. 당연히 교육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장 훈육관의 훈육 책임부터 따진다. 나처럼 좀 큰 사고(?)를 치면 더더욱 훈육 책임을 묻게 된다.
우리 동기는 남자가 100명, 여자가 20명이었다. 우리는 모두 40명씩 세 개 반으로 나뉘었다. 나는 A반 17번이었다. 전반기 교육의 모든 과정은 반 단위로 이루어졌다. 운동경기도 반 단위로 시합이 벌어졌다.
노란 명찰… 병아리 기관원의 임시 신분증
우리는 정식 신분증 대신 노란색의 임시 명찰을 지급받았다. 청사 내에서는 항상 명찰을 양복 상의에 부착하고 다녔다. 노란색은 병아리를 연상시키는 색깔이기 때문에 아마도 교육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노란 명찰은 병아리 기관원의 임시 신분증이었던 셈이다.
동기들 간에 나이 편차가 있었다. 나이 많은 동기와 가장 어린 동기는 7‧8년의 차이가 났다. 대학을 마치고 곧바로 입사한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사회에서 몇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기들 가운데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재수와 휴학으로 인해 입사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그중에는 내가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동기도 더러 있었다.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언어 문제로 불편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언어 문제 때문에 서로 토론도 하고 해결책을 모색했지만 결론이 잘 나지 않았다. 입사 동기라면 서로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데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성인이 된 후 입사한 탓에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내 경우에도 동기 중에 고등학교 3년 후배가 있었다. 그래서 같은 동기지만 나이 차이가 좀 나면 서로 존댓말을 쓰곤 했다.
입사 첫날, 우리는 양지관이라는 기숙사에 입소했다. 방은 2인 1실로 배정받았다. 양지관은 사각형 모양의 다층 건물이었는데 건물 중간에 조그만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양지관뿐 아니라 이문동 청사 내의 거의 모든 건물이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미관상으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중간이 뚫린 사각형 구조가 폭격을 맞을 경우 건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구조라고 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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