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잠복 공작의 전말
30여 년간 암약하다 1985년 검거된 김철 일당 사건은 북한 대남공작지도부가 연고선을 통해 구축해 놓은 지하당 조직 공작을 장기 잠복 공작으로 전환해 추진하다 검거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철은 광복 후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활동하다 1948년 월북하여 1년간 당학교에 입학해 공부한 다음 1949년 남쪽으로 내려와 남로당 경북도당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남로당 고위 간부 출신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노동당 간부로 활동하던 김철은 1953년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공작 교육과 함께 대남 침투에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1954년 북한 공작지도부로부터 남한 내 월북 연고자·남로당 가담자·북한군 부역자들을 포섭해 간첩망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받고 남파된 김철은 서울과 대구 등지를 오가면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다 1957년 경찰에 검거되었다. 경찰에 검거된 김철은 경찰의 대공 수사에 적극 협조할 것을 맹세하고 사상 전향까지 한 다음 감옥에서 풀려나와 정식 호적을 취득함으로써 합법적인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1960년 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남파된 동향 출신 배창환이 김철을 찾아와 남조선 혁명을 같이할 것을 호소하자 다시 대남 공작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사상 전향은 가짜였던 셈이다.
김철을 만나 검거되기 전까지 그가 조직해 놓은 간첩망과 검거된 후 사상 전향 과정 등 김철의 공작활동과 관련한 내용을 확인한 뒤 북한으로 복귀한 배창환이 자신의 활동 결과와 함께 김철과 관련된 내용을 보고하자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에서는 집중 검토에 들어갔다.
당시 대남공작지도부 간부들은 김철의 사상 전향이 진짜냐 위장이냐를 놓고 열띤 논쟁을 했으나 배창환이 김철을 만나 확인한 검거되기 전 김철의 공작 활동 내용과 사상 전향 경위 등을 구체적으로 청취한 뒤 그의 사장 전향이 ‘위장’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다시 대남 공작원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진 뒤 1970년 재남파된 배창환은 김철을 접선한 다음 그에게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의 결정 내용을 전달하고 힘을 합쳐 지하당 조직 구축 공작을 전개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후 배창환과 김철은 월북 연고자와 구 남로당 관계자·북한군 부역자들 가운데 합법적인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사상이 변질되지 않은 인물들을 찾아내 포섭한 다음 각종 형태의 친목 모임을 조직했다. 그리고 친목 모임 운영을 빙자해 거기에 참여하고 있던 인물들에 대한 사상 교육을 하고 그 과정에 당원으로 입당시킬 대상을 선발하려고 했다.
한편,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에서는 김철·배창환의 공작 활동을 점검하기 위해 여성 공작원 김정임을 침투시키기도 했다. 배창환과 김정임은 김철 일당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4~5년 잠복해 활동하다 1975년 남한에서 주민등록증 갱신 교부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자 위조신분증을 소지하고 있던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날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북한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으로 복귀한 배창환·김정임은 대남 공작 성과를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호적을 취득해 합법적인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은 후 간첩 활동을 다시 시작한 김철은 자신이 포섭한 간첩 일당을 지휘하면서 10여 년간 더 활동하다가 1985년 적발 검거됨으로써 일망타진되었다.
청사포 사건의 숨겨진 진실
1985년 10월 부산 청사포 앞바다에서 한국 해군에 의해 북한 반잠수정이 격침됨으로써 발생한 ‘청사포 사건’은 앞서 언급한 ‘풍산호’ 사건처럼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어 바로 잡으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사포 사건은 1985년 10월20일 부산 해운대구 청사포 앞바다에 침투했던 북한 반잠수정을 한국 해군이 격침한 사건이다. 당시 해군에서는 “청사포 해안을 향해 침투하던” 북한 반잠수정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해 격침시켰다고 발표했고, 관계기관 자료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당시 북한 반잠수정은 청사포 해안을 향해 “침투하는 과정에 격침된 것”이 아니라 이미 청사포 해안에 침투해 남파 공작원 2명을 무사히 상륙시키는 임무를 수행한 후 공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공작선(母船)을 만나기 위해 “복귀하던 중 격침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관계기관 발표처럼 반잠수정이 남한 해안으로 침투하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이미 청사포 해안에 침투해 공작원들을 상륙시켜 주고 복귀하던 중에 격침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남파 공작조는 조장 강모와 조원 박모 등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반잠수정을 타고 안내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사히 청사포 해안을 통해 침투한 후 육지에 상륙하는데 성공했다.
안내조와 헤어진 공작조는 청사포 해안과 가까운 마을까지 이동해 근처 산속에 은폐해 있다가 날이 밝은 후 옷을 갈아입고 도로에 나와 택시를 탔다. 강모 조장은 이전에도 남한에 침투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운전기사 옆 좌석(조수석)에 앉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이동했지만 대남 침투가 처음이었던 조원은 대화에 익숙하지 않아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들이 택시를 타고 부산 시내로 이동 중 갑자기 임시검문소가 나타났다. 북한에서 침투 준비를 하면서 연구할 때는 없었던 것이었다. 임시검문소는 군경이 합동으로 근무하는 검문소였는데 경찰관이 이들이 타고 있던 택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택시에 타고 있던 공작원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이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당황했다.
그러나 강모 조장은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경찰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며 신분증을 건네주었고, 조원 박모는 떨려서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신분증을 넘겨주었다. 경찰관은 공작원들이 제시한 신분증을 가지고 임시검문소로 들어가 한참동안 조회하더니 신분증을 건네주고 경례를 하며 보내 주었다.
영문을 모른 채 신분증을 받아든 공작원들은 북한에서 공작선을 타고 며칠동안 항해하면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부산 시내 모처에 있는 목욕탕으로 이동했다.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 공작원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탈의실 홀에 설치된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무심코 보았다. 그런데 TV에서는 북한의 대남 침투 관련 상황이 발생했다며 군에서 ‘진돗개하나’를 발령하고 경계 강화에 들어갔다는 내용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공작조장과 조원은 한참동안 TV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자신들이 타고 침투했던 반잠수정이 공해상에 대기하고 있던 공작선을 향해 복귀하던 중 해군 레이더에 걸려 격침되었고, 그 때문에 ‘진돗개하나’가 발령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결론과 함께 향후 시간이 갈수록 부산 지역의 감시 통제가 강화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는 추가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공작조장과 조원은 신속하게 샤워만 간단히 하고 목욕탕을 빠져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다음 전남 광주행 버스를 타고 경상도와 반대편인 전라도로 피신하여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1개월을 보냈다.
그 후 강모 조장과 박모 조원은 공작 활동 지역인 대전으로 이동해 2년 동안 잠복해 대전 및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1987년 가을에 북한으로 복귀했다.
북한 복귀 후 2명 모두 공화국영웅 칭호와 함께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으며, 1988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전국영웅대회에도 참석했다.
북한으로 복귀한 이들은 자신들이 청사포 해안으로 침투하는 과정에 발생했던 구체적인 상황과 그 후 2년 동안 한국에서 공작 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내용 등을 10개의 녹음테이프에 자세하게 담아 전달함으로써 후배 남파 공작원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울러 북한 공작지도부 간부들은 청사포 침투 공작원들이 당시 겪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남파 공작원들이 소지하는 위조신분증은 남조선 경찰도 진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만들기 때문에 검문검색을 당하더라도 절대로 겁먹거나 당황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대일 공작에 투입된 신광수
1985년 6월28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는 1973년 7월2일부터 12년 동안 6차례에 걸쳐 일본에 침투하여 공작 활동을 해 온 거물 간첩 신광수(당시 56세·노동당 조사부 소속)를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북한 공작원 신광수에게 포섭된 후 그의 지령에 따라 25회에 걸쳐 국내에 왕래하면서 간첩 활동을 해 온 재일교포 김길욱(당시 57세·오사카 소재 의류소매상)·방원정(당시 50세·도쿄 소재 주점 운영) 등 2명의 간첩을 함께 검거해 서울지검에 송치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들에게 포섭되어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해 오다 자수한 예비역 장교 이성수(당시 47세·Y정밀주식회사 부사장)에 대해서는 자신의 죄과를 깊이 뉘우치고 자수한 정상을 참작하여 관용을 베풀어 훈방 처리했다고 발표했다.
신광수 간첩 사건은 북한 공작원이 일본인의 신분으로 한국에 합법적으로 침투한 후 암약하다 적발된 사건으로서 일본을 통한 우회 침투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신광수는 1929년 6월27일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광복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포항중학교 재학 시 ‘2.7구국투쟁’에 가담해 좌익 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도피했다. 도피처인 서울에서 보성중학교에 다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했다. 휴전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된 신광수는 1954~60년 6년간 동유럽 국가인 루마니아로 유학가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귀국 후에는 정무원 산하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10년간 연구사로 재직했다.
신광수가 공작요원으로 선발된 시기는 1971년 2월이다. 그는 당시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 제198부대 대남 요원으로 선발된 후 일본공작과에 배치받아 2년반 동안 청진 초대소에서 밀봉교육을 받았다.
그는 초대소에서 김일성 혁명 역사와 주체사상·정보수집 기술·사격술·지형학(독도법)·격술 및 수영·간첩 지령 수신 방법·암호 조립 및 해독 방법 등 각종 공작 관련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아울러 일본에 살고 있는 북송 재일교포 연고자들의 신상 자료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일본어 교육도 받았다.
이와 같은 교육 및 훈련을 받은 신광수는 1973년 7월 당시 198부대장이었던 임호군으로부터 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대일 공작에 투입되었다.
당시 신광수가 받은 공작 임무는 일본에 침투한 후 북송교포 연고자들을 접촉 포섭하여 재일 지하공작 토대를 구축할 것·재일교포 가운데 혁명의식이 있는 동조자를 포섭하여 입북시킬 것·남한 및 일본의 각종 정보 자료를 수집하여 보고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공작 임무와 함께 공작금으로 미화 2만 달러·무전기와 난수암호표 등을 받아가지고 공작선에 승선해 원산항을 출발, 일본 이시카와현 해안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에 침투하는 북한 공작원들의 경우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의 신원 정보를 기재해 넣은 위조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 소지하는 수법으로 신분을 위장한다.
일본 침투에 성공한 신광수 역시 북한 공작기관에서 위조해 만들어 준 외국인등록증을 휴대하고 북한에서 계획한 대로 오사카로 이동해 그곳에 살고 있던 북송 재일교포 연고자 홍경생(여·65세)을 찾아갔다. 60대 여성인 홍경생을 만난 신광수는 그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북송된 외아들의 신상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방식으로 포섭한 다음 일차적으로 그의 집에 은신처를 마련했다.
2개월 후인 1973년 9월 홍경생의 주선으로 조총련계 재일교포인 김차훈(51세)을 포섭하고 그의 집으로 은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김차훈의 장인인 은무암(79세)을 만나 북송된 그의 차남 신상에 해로울 것이라는 협박과 회유의 방법으로 포섭하였다.
1976년 2월에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은정웅(55세)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또다른 조총련계 교포인 고기원(52세)을 포섭했다. 이후 고기원을 통해 조총련 오사카 초급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후 오사카에서 의료소매상을 하고 있던 김길욱(57세)에게 접근해 재북 처남의 신상을 위협하는 등의 수법으로 그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포섭한 김길욱에게는 ‘민단에 위장 전향하여 남한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것·남한에 살고 있는 친척 및 친구들을 포섭해 간첩망을 구축할 것’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1976년 9월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복귀하게 된 신광수는 김길욱에게 ‘앞으로 북한 공작원의 접선 연락이 있을 것이니 그 지시에 따라 입북할 것’을 지시한 다음 그의 도움으로 접선 장소인 도야마현 해안으로 이동해 북한 안내요원들과 접선, 공작선을 타고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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