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칼레(Calais)는 도버 해협을 끼고 영국과 마주 보고 있다. 백년전쟁(1337~1453)이 한창이던 무렵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칼레를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집중 공격을 퍼붓게 된다.
칼레는 기근까지 덮친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지만 1년 만에 두 손을 들고 만다. 도시 하나를 함락시키는 데 온갖 진을 뺀 에드워드 3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칼레 시민 모두를 몰살시키겠노라 선언한다.
하지만 측근들이 만류하고 나서면서 6명만 처형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몰살의 위험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가운데 죽을 사람을 고르는 일은 칼레 시민에게 또 다른 재앙이었다.
그때 최상류층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내가 죽겠노라 앞으로 나선다. 그러자 관료들과 부자들이 그 뒤를 잇는다. 그렇게 귀족으로만 6명이 추려졌다. 교수형이 있는 날 6명은 목에 밧줄을 매고 속옷 차림으로 성문 열쇠를 들고 대중 앞으로 걸어 나온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다행히 교수형이 진행되려는 찰나 왕비 필리파 에노가 만류하여 그들은 구제된다. 당시 왕비는 임신 중이었는데 태아에게 해가 미칠 것을 우려해 에드워드 3세에게 그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일종의 태교 개념이다.
이 이야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는 뜻으로 기득권자가 사회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1885년 칼레의 시민위원회는 로댕에게 이 이야기를 조각으로 옮겨 줄 것을 부탁한다. 로댕은 위원회의 주문대로 피에르를 영웅적으로 묘사한다. 시선을 위로 향한 것이 ‘죽음아 덤벼라!’ 외치는 듯하다. 피에로는 누가 봐도 위풍당당한 영웅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작품을 완성한 후 로댕은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그들도 인간이 아닌가. 어떻게 죽음에 초연하기만 할 수 있을까. 로댕은 이 작품을 실물 크기로 다시 만들면서 고뇌와 두려움에 휩싸인 인간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로댕은 칼레의 시민을 12개 복제품으로 제작했다. 그중 하나가 한국에 있다. 서울 태평로 삼성생명 본사 미술관에 전시됐던 ‘칼레의 시민’이 그것이다.
2016년 미술관 폐관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던 이 작품이 27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 다시 등장한다고 한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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