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65] 생존의 다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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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18 06:30:03

누구 하나 지나가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거나 눈을 맞추지 않았다. 태주는 승연의 손을 잡고 공장 견학하듯 열과 열 사이로 지나갔다. 창문 아래 공간에는 원단이 빼곡하게 쌓였고, 몇몇 남자가 담요같이 생긴 두꺼운 천을 공중에서 펄럭이자 천정에 매단 형광등 아래로 뽀얀 먼지가 흩뿌려진 물안개처럼 비쳤다. 먼지는 공기와 공존했으나 어느 누구도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계단 한 층을 더 올라가자 엄청난 양의 원단이 새벽 배달 전 보급소 신문지처럼 쌓여 있었다. 가위와 길게 휜 대나무 자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원단 먼지보다 무거워 보였다. 조그만 창문이 있긴 하지만 실내 공기를 환기할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근로자들이 밤이 돼서 방을 비우면 공기 중에 부유하던 먼지는 바닥에서 포복하듯 기다렸다 출근 시각에 맞춰 활동을 시작했다. 앞장서던 태주도 먼지가 날릴 때마다 손으로 휘휘 저을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양복점 하셨다지? 일제 시절 양복점 하셨으니 주로 일본군 장성이나 고위급 인사들이 단골이었겠네.” 김태주는 신입생 환영회 때 승연의 자기소개를 기억했다. “혼자 사환 한둘 두고 재단·재봉까지 다 하셨을 테니 솜씨가 대단하셨을 거야. 돈도 많이 버셨을 테고. 승연 아버님이 의류공장 하신다면 구로·부천·인천 주안 중 하나에 있겠네?”

그는 열악한 피복공장 환경을 보고 나니 어때? 너희 아버지 공장도 다르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고 싶은 걸 다르게 질문한 것 같았다. 승연은 죄지은 사람처럼, 태주의 고통이 승연의 안락함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평이요….”

“여기 근로자들은 아침 7시에 나와서 일을 시작하지, 밤 11시까지.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대단해. 집에 가서 애 밥 해 먹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도시락 싸서 여기와 까 먹어. 얼마 되지 않는 돈 아끼려고. 아프고 열 나도 계속 일해야 해. 한 3일 빠지면 쫓겨나거든. 그러니까 아파도 앉아서 재봉틀 돌리는 거야. 안질·치질·신경통·신경성 위장병·폐결핵 같은 거 달고 살아. 죽기 직전에 자기가 그런 몹쓸 병에 걸린 줄 알지. 아파도 진통제 먹고 견뎌야 했으니까. 내 사촌 누나가 결핵으로 죽는 순간까지 먼지 마시며 재봉틀 돌렸어. 죽어야 끝나더라고 가난이, 그러니까 가난은 죽음의 그림자인 거야. 가난이 운명인 사람들은 24시간 중 단 몇 분도 선택 못 해. 시간이 노동이고 시간이 삶인 걸.”

뼈마디 마디 부서지는 고통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무게는 가난이라는 짐이었다. 짙은 고독과 외로움의 시작이 가난이었고 가난을 끝내야 그의 외로움도 끝이 나는 거였다. 공장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밖은 어둑어둑했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청계천 6가는 심란한 승연의 마음만큼이나 어두웠다. 승연은 인간의 생존에 각기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태주가 공장 견학을 마친 뒤 온갖 상념에 빠져있는 승연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배 안 고파? 칼국수 먹을래?”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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