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海瑞)는 16세기 명(明)나라의 청백리이자 충신이다. 수백 년 뒤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대혁명에 영향 끼친 인물로 유명하다.
1961년 우한(吳晗)은 해서의 파직·복직을 다룬 작품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발표했다. ‘해서파관’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황제’ 마오쩌둥(毛澤東)은 ‘우파’가 스스로를 해서에 견주고 자신은 암군에 빗댄다고 견강부회(牽強附會)했다.
실정 끝에 국가주석에서 쫓겨난 마오쩌둥은 해서파관을 기화로 권력을 되찾고자 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그는 류사오치(劉少奇) 등 ‘우파’를 실각시켰다. 폭정 앞에 중국공산당은 천안문사태라는 절체절명의 폐당(廢黨) 위기를 맞았다. 중국공산당은 결국 흑묘백묘론(黑猫白描論)·선부론(先富論) 등 사실상의 ‘우파’의 길을 택했다.
과거에 급제한 해서는 권력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청렴한 황제를 사칭하면서 사치를 즐기고 괴이한 사상에 심취했던 가정제(嘉靖帝)도 서릿발 충언을 비껴가지 못했다.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등에 의하면 해서는 1566년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가정(嘉靖)의 사람은 집안이 가정(家淨)하다.” 가정제 치세 백성은 하도 가난해서 집안이 더 이상 깨끗할 수 없으므로 정신 차리라는 신랄한 충고였다.
대로한 가정제는 즉각 처벌을 명했다. 주변은 입 모아 말렸다. “해서는 식솔과 작별한 뒤 관을 짜 놓고 왔다.” 민심이 들끓자 가정제는 어쩔 수 없이 투옥만 시켰다. 이듬해 가정제가 사망하자 해서는 융경제(隆慶帝)에 의해 복직됐다.
해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응천순무(應天巡撫)가 된 그는 1569년 향신(鄕紳)들이 강탈한 전답을 백성에게 모조리 돌려줬다. 몰수 대상자 중에는 청백리를 자처하며 가정제 앞에서 해서를 변호했던 재상 서계(徐階)도 포함됐다. 해서는 재차 파면됐으나 1585년 만력제(萬曆帝)에 의해 복직됐다.
현 거야(巨野)가 청와대에 입성했던 이래로 대한민국 정치·사회·경제는 거덜난 지 오래다. 거야는 집권 때나 지금이나 ‘1극’ ‘사회주의’ ‘내로남불’ 등 논란을 사고 있다. 현 대통령은 이에 대한 직언에 나섰다가 탄핵·구속됐으나 최근 법원에 의해 구속취소 결정이 내려졌다. 해서는 바른말 하다 두 번이나 투옥되거나 낙향했으나 결국 두 번 모두 석방·복직됐다. ‘여의도 대통령’으로서 사실상 권력을 오로지하는 거야는 성난 민심 앞에 강제로 정상화되거나, 융경제 등처럼 자발적으로 정상화되거나 양자택일해야 한다.
오주한 정치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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