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안기부가 정무수석 직속이냐”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챙기지 않다 보니 문민정부에서는 정보가 왜곡 유통되는 폐단이 생겼다. 다시 말해 보고서가 엉뚱한 곳으로 샜다는 얘기다. 정보가 이원종 정무수석에게로 몰렸고 김현철이라는 사인(私人)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문민정부 내내 안기부의 국내 부서에서는 “안기부가 정무수석 직속이냐”는 자조적인 말들이 돌았다.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안기부의 정무수석 예속화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오 실장의 부속실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원종 정무수석에게 보내는 주간 정치권 동향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는 내부 보안 규정을 위반한 것이었다. 첩보 수집 부서인 대공정책실에는 정보보고서를 만들 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 국내 문제에 대한 모든 정보보고서는 기획판단국의 소관이었다.
매주 토요일 정무수석에 첩보 보고… 감찰실에서도 묵인
보통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칙대로라면 감찰실에서 보안 조사를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감찰실에서는 뻔히 알면서도 묵인했다.
당시에는 매일 오후 2시가 첩보 보고 마감 시간이었다. 요즘이야 수집관이 컴퓨터로 첩보를 작성해 전산망을 이용하여 분석 데스크로 송고하겠지만 내가 대정실에 근무하던 시절에만 해도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첩보보고서도 손으로 작성했다. 매일 각 과의 행정관들이 첩보를 수거해 행정과에 가져오면 행정과 기획팀에서 커다란 가방에 담아 기획판단국으로 배달하곤 했다. 부속실에서는 행정과에 “매일 첩보 가방이 기판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부속실부터 들르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날 수집된 첩보들 중에서 가장 ‘쓸 만한’것들만 따로 골라내 복사했다. 주로 정치인들의 동향과 가십성 첩보만 가려냈다. 이렇게 하루에 몇 건만 추려도 일주일이면 수십 건의 첩보가 쌓였다. 나는 골라낸 첩보를 토요일 오후에 요약하여 보고서 형태로 정리했다. 보통 한 페이지에 두 건씩 20∼3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만들었다.
원래 이 작업은 오 실장이 이용○ 보좌관에게 시킨 일이었는데 그는 보고서 정리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는지 그 일을 자꾸 내게 미뤘다. 그래서 정보분석 경험도 전혀 없던 내가 보고서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정보기관에 갓 입사한 말단 직원이 그렇게 민감한 정보를 취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오정소 실장이라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에 내가 대정실을 떠난 후에는 그 일은 정치과 기획반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부속실은 ‘정치권’‧ 방송과는 ‘언론계’ 주간 동향 보고서
부속실에서 작성하던 정치권 주간 동향 보고서 이외에 방송과에서는 언론계 주간 동향 보고서를 만들었다. 서진○ 방송과 기획관이 매주 토요일 오후에 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사실 언론권 동향 보고서는 신문과에서 맡아야 제격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재○ 방송과장이 먼저 그 일을 차지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과장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겠다. 그는 부산에 집을 두고 서울에서 호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회사 일로 가정까지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일에 대한 열정과 아이디어는 풍부했지만 인간성은 별로였다. 그는 윗사람에게는 확실히 아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군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부산지부에서 정보과장을 오래 했지만 사실은 전라도 사람이었다. 출신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헷갈리는(?) 사람을 우리는 은어로 ‘얼룩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전형적인 얼룩이었다. 언론계 주간 동향보고서 덕택에 그는 김영삼 정권에서 동기들보다 먼저 승진했다.
‘얼룩이’ 이 과장… DJ 정권 들어서자 더 승승장구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더욱 승승장구했다. 그는 대구지부장으로 영전해 소위 ‘밀라노 프로젝트’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대구 지역의 섬유산업을 발전시키는 방안이었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때 이탈리아의 섬유 패션산업과 협력하는 다양한 방안이 정부 차원에서 구상되어 추진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기반이었던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안기부 비공식 보고서의 위력… 정치권‧언론계 쥐락펴락
매주 월요일 아침 이용○ 보좌관이 우리 부속실이 작성한 정치권 주간 동향보고서와 방송과가 정리한 언론계 주간 동향 보고서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 두 비공식적인 보고서의 위력은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이원종 수석은 정치권과 언론계 동향 보고서를 양손에 쥐고 정치권과 언론계를 완벽하게 쥐락펴락했다. 이들 보고서 덕택에 그는 정치권과 언론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었다. 신문기자들은 이 수석이 어떻게 그렇게 언론계 동향을 잘 아는지, 자신들이 몰래 장관들과 만나는 사실을 이 수석이 어떻게 그렇게 실시간으로 파악하는지를 신통해 했다.
나는 가끔 내가 쓴 비공식적 보고서의 위력을 보고 나 자신도 놀랄 때가 있었다. 가령 장관급 인사의 비리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때가 있었다. 나는 ‘7급 공무원에 불과한 내가 장관의 모가지를 자르는 일을 해도 괜찮은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러다가 ‘내가 너무 교만해지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속실에 근무하는 덕분에 매일 수천만 원어치의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런 짓은 너무 오래 할 일은 아니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려한 비상‧허무한 결말의 문민 정권… YS의 개인 성향이 원인
나는 문민정부의 화려한 비상과 허무한 결말이 ‘김영삼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에 많은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는 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의 가려운 곳을 간파하고 충족시켜 줄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이러한 성향 덕택에 국민으로부터 초유의 인기를 누렸다. 한때 지지율이 90%대에 육박했다. 대통령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지지율이 오히려 부담스럽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평소 그의 지론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머리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 셈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조깅은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머리 좋은 사람을 찾아 쓰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가 기용했던 수많은 인사는 김현철을 통해 소개된 ‘이류’ 인재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어쩌면 체질적으로 ‘일류’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현철 중심으로 ‘끼리끼리’ 말아먹은 YS 정권
그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정치적인 ‘감(感)’에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측근들도 대체로 하나같이 ‘감’에 의존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오정소 실장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은 ‘감’은 예리하고 순발력은 뛰어났지만 논리는 허술하고 지구력은 부족했다. 골방에 앉아서 끼리끼리 작당하는 데는 능했으나 광장에 나와 백년대계를 논의하기에는 턱없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문민 정권은 ‘기본이 안 된’사람들이 끼리끼리 작당하면서 망가졌다. 그 중심에는 항상 소산(小山) 김현철이라는 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현철 씨의 국정 농단이 심해질수록 정권은 더욱 심각하게 망가져 갔다.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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