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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정원 직원의 양심 증언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8] 문민정부 ‘뉴스로 뉴스 덮기’… 사건‧사고 무마에 급급
김기삼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19 06:24:30
 
 
▲ 김기삼 전 국정원 내부고발자
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열광적 지지 받은 문민정부의 개혁
 
문민정부의 출범은 그야말로 창대했다. 애초에 문민정부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민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사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사회 곳곳에서 겁 없는 망나니의 칼춤이 어른거렸다.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군대 내 사조직과 특정 인맥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엘리트 장교가 쫓겨난 자리에는 또 다른 부패한 인물들이 들어섰다.
 
비록 기득권층의 반발과 개혁 세력의 준비 부족으로 목표했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법조계와 교육계 등 사회 각 분야의 뿌리 깊은 고질병을 도려내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한 점은 인정해 줄 만했다. 몇 가지 부분에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민주화에 큰 진전을 이루기도 했다. 전격적인 금융실명제 실시와 공직자 재산 공개 같은 것들은 문민정부가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민정부 둘째 해부터 각종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로 정점 찍어
 
문민정부 초기에는 이러한 개혁정책 덕분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다가 정권이 둘째 해를 맞으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전국 각지에서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마치 겨우내 얼어붙었던 축대가 봄이 되면서 무너져 내리는 형국이었다. 육‧해‧공뿐만 아니라 지하에서조차 연쇄 다발로 사고가 일어났다. 구포에서 열차 사고가 일어나더니 격포에서는 여객선 사고가 이어졌다. 마포에선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고 행렬은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나는 곳은 모두 ‘포’자 지명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자 소위 ‘카더라’ 통신이 난무했다. “다음 번에는 김포에서 비행기 사고가 난다더라” “영등포에서 지하철 사고가 터진다더라”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사회가 어수선해지면서 대통령의 지지율도 급전직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뉴스로 뉴스를 덮어라”
 
김영삼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일어난 조창호 소위의 귀환에 대한 얘기는 좀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통일부의 ‘국군 포로 탈북 귀환 현황’ 자료에 의하면 1994~2008년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 포로 가운데 74명이 탈북해서 귀환했다. 조창호 소위의 탈북이 그 효시였다.
 
1994년 10월, 멀쩡하던 성수대교가 어느 날 아침 중간이 끊어져 내려앉으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부랴부랴 묘책을 찾아야 했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더 큰 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 문민정부 시절에는 사건이 터지면 더 큰 사건을 만들어 덮으려 했다. 정권의 마지막 해 야당이 김현철 문제를 들추며 공격하자 정국을 전환하기 위해 황장엽 선생을 허겁지겁 데려온 것이다. 1997년 4월20일 북한 노동당의 황장엽(왼쪽) 전 국제담당 비서(74)가 측근인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전 총사장과 함께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탈북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의 귀환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탈북한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사실 안기부는 애초부터 조창호 소위가 탈북해서 중국을 통해 귀환을 시도하고 있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그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조창호 소위는 출신 집안이 괜찮았다. 서울과 미국에 사는 친지들이 그의 탈북을 돕고 있었다. 조 소위의 조카가 중국 현지까지 들어가서 조 소위와 동행했다.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의 최우석 기자였다. 정보기관이 해야 할 일을 언론사의 기자 하나가 대신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초 조 소위 일행은 조그만 통통배를 이용해 서해를 건너려고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는 파도가 너무 높아 실패하고 되돌아갔다. 두 번째 시도 때는 풍랑으로 배가 실종되고 말았다. 김덕 부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창호 소위를 살려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조 소위 데려와 거창한 환영식… 성수대교 붕괴 덮어
 
안기부는 수산청의 어업 지도선을 총동원해 서해를 이 잡듯이 뒤졌다. 수색 작업은 수산청을 담당하던 최모 서기관이 주도했다. 총력을 기울여 수색한 끝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사흘 만에 조 소위를 구출해 낼 수 있었다. 정부는 즉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거창한 환영식을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1호가 탄생한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초 조 소위 집안에서는 북쪽에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자신의 귀환 소식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그들은 북쪽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한 달 만이라도 공개를 좀 늦춰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의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북쪽의 가족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것은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그 후 조창호 소위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몇 차례 워싱턴까지 와서 북한의 참상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인사라도 드리려고 그의 숙소를 찾아갔지만 끝내 만나보지 못했다. 몇 년 전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 많은 인생살이에서 대한민국에서의 그의 말년이 얼마나 보상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기응변의 ‘땜질’ 처방 난무한 문민정부
 
이처럼 문민정부 시절에는 임기응변의 ‘땜질식’ 처방이 잦았다. 사건이 터지면 더 큰 사건을 만들어서 뉴스로 뉴스를 덮으려고 했다. 1997년 황장엽 선생의 망명 사건도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였다.
 
문민정부는 정권의 마지막 해를 시작하면서 노동법과 금융관계법을 날치기로 개정하려다가 실패했다. 정국이 경색되면서 야당은 김현철 문제를 들추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철 사건이 엉키면서 정권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황급히 정국을 전환할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황장엽 선생의 망명은 그런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조금이라도 공작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라면 황 선생 같은 거물은 북측 깊숙이 심어 놓고 오래도록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다 보니 허겁지겁 데려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황 선생과 김덕홍 선생의 가족이 애꿎게 희생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정부가 황 선생과 김덕홍 선생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부패와 뇌물‧협잡과 비리가 만연한 우리 사회
 
나는 우리 사회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우리 사회 전체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으로 타락해 있는지 절감했다. 정계와 재계는 말할 것도 없고 법조계‧의료계‧종교계‧교육계‧문화계‧예술계‧언론계‧연예계 등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의 싹이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내가 들여다본 우리 사회는 이미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어느 분야에나 부패와 뇌물‧협잡과 비리가 만연했고, 반칙과 편법‧음모와 모략‧술수가 판을 쳤다. 건전한 직업 윤리‧정직과 양심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2000년대 들어 황우석‧신정아라는 두 명의 걸출한 스타가 나타나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를 온몸으로 웅변해 보였다. 그 이전 1990년대 중반의 내가 본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정인을 거론해서 좀 안됐지만 내가 본 두 사람의 공인에 대한 사례를 들어보겠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점잖고 인자한 이미지를 가진 모 중견 남자 아나운서가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대한민국 최고의 신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사생활은 신사의 그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그는 “룸살롱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온갖 지저분한 짓을 스스럼없이 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가 어느 상갓집에서 술에 취해 가발이 벗겨지도록 행패를 부리는 걸 내 눈으로 두어 차례 본 적도 있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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