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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와 북한의 대남공작 비록(祕錄)
[김동식 기획연재] <9> DJ를 친미 사대주의자라던 김정일… 88올림픽 막으려 KAL기 사건 계획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28 06:20:30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DJ를 친미 사대주의자로 낙인찍고 핫라인 구축 공작 하려 했던 김정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대중이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국내로 돌아온 후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이 그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표출하자 ‘친미 사대주의자’로 매도했던 김정일은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1995년 필자가 속한 남파공작조에 임무를 부여해 김대중과의 핫라인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당시 필자의 공작조가 김정일과 북한 공작지도부로부터 부여받았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1980년 4월 스님으로 위장하고 남한에 침투해 활동 중인 남파 공작원 ‘봉화1호’를 접선하여 대동 복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가 포섭했다고 보고한 시인 고은(공작 대호 ‘고봉산’)을 통해 1997년 12월에 실시되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김대중과의 핫라인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1995년 당시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사회문화부(현 문화교류국) 대남공작 담당 부부장이었던 이원국은 대남 침투를 앞둔 필자와 조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차기(제15대) 남조선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소. 김대중은 과거에 우리가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오. 말하자면 우리 덕을 많이 입었소. 이번에 선생들이 침투해서 김대중과 우리와의 비상 연락선(핫라인)을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그가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원활한 연락을 유지할 수 있소.
 
현재 김대중 주변에 사람이 많지만 대부분 국회의원이거나,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많이 공개되고 노출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우리와 비공개적으로 연락원 역할을 할 사람이 많지 않소. 그런 의미에서 고은 시인은 김대중과 우리를 가운데서 연계시켜 줄 적임자라고 할 수 있소.
 
봉화1호가 고은을 포섭했다고 보고했으니 이번에 선생들이 침투해서 봉화1호에게서 고은을 넘겨받은 다음 그를 통해 김대중과의 비상 연락선을 만들어 놓고 오면 되겠소.”
 
필자의 공작조가 남한에 침투하기 전 부여받았던 위와 같은 공작 임무는 스님으로 위장하고 남파되었던 ‘봉화1호’가 이미 전에 검거되어 전향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은을 통해 김대중과의 핫라인을 구축하려던 김정일의 계획은 애초부터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2년 후에 김대중이 실제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당시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지도부의 정세 분석과 판단은 적중한 것이었고, 그에 기초해 김대중과의 핫라인 구축을 시도했던 것은 상당히 치밀한 공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000년 6월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친미 사대주의자’ 김대중을 만난 김정일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정경희와 연락부의 몰락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주요 대남공작부서 가운데 하나였던 중앙당 연락부가 통일전선부에 흡수 통합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일개 공작원 신분에서 ‘중앙당 연락부장’이라는 대남공작부서 책임자에 전격 발탁되었던 정경희가 갑자기 좌천되고 그가 지휘하던 연락부도 허담의 통일전선부에 통폐합된 것이다.
 
연락부장 정경희는 원래 대구 출신으로, 6·25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일선에서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전설 같은 인물이었다. 정경희는 1990년대 초반까지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역임한 바 있는 유정숙과 1980∼90년 10년간 남한에 침투해 공작 활동을 벌이다 복귀한 후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역임한 이선실과 함께 대남공작 분야의 여성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76년 중앙당 연락부장에 임명된 경경희는 1980년 10월 개최된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남파공작원 이선실과 함께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83년에는 중국을 비공식 방문하는 김정일을 수행하는 등 김정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이렇게 김정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던 정경희는 1987년 여름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항일 빨치산 시절 지하공작 경험을 대남공작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연락부장에 임명될 때와 마찬가지로 전격적인 해임이었다.
 
사실 정경희를 중앙당 연락부장 직책에서 해임하면서 내걸었던 이유는 상식적으로 봐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빨치산 시절 지하공작 경험이라는 것은 역사가들이 조작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일제강점기와 1980년대 대한민국의 상황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그 허구마저도 대남공작에 참고하거나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 정경희의 해임은 김정일이 자신의 최측근인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허담에게 정경희가 책임자였던 연락부를 포함하여 대남공작과 관련한 전권을 넘겨주기 위한 액션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경희는 중앙당 연락부장에서 해임된 후 다시 평범한 공작원으로 돌아와 평양시 교외인 삼석구역 소재 초대소에서 자료정리를 하면서 노년을 보내게 되었다.
 
정경희가 연락부장에서 해임되면서 그가 관장하던 연락부는 김정일 지시에 따라 통일전선부와 통합되면서 간판을 내리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말이 통합이지 당시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허담의 통일전선부에 사실상 흡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연락부가 통전부에 통폐합되면서 만들어진 통합부서의 명칭이 ‘대외연락부’였다.
 
연락부가 통일전선부에 흡수 통합된 후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가 단행되었다. 사실상의 대규모 숙청이었다. 여러 명의 연락부 부부장들이 해임되어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하위 직급인 과장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가 소속되었던 연락부 대남공작과 담당 부부장이었던 이원국도 과장으로 강등되었다. 이들에 대한 숙청도 정경희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을 우상화하는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2개의 중앙당 공작 부서가 통폐합되면서 공작 지역이나 업무가 겹치는 연락부의 해외담당 공작과 소속 간부들과 공작원들은 더 심한 부침을 겪었다. 특히 일본 담당 공작과의 경우에는 통전부의 일본 담당 공작과 인원만 남기고 연락부 소속이었던 일본 담당과 공작원들 대부분이 해임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 와중에서 살아남은 연락부 소속 공작 부서는 대남공작과가 거의 유일했다. 통일전선부가 일본과 유럽을 무대로 하여 해외 공작을 주로 하고 있었던 반면, 직접 남한에 공작원을 침투시켜 지하당 건설 공작을 전개하는 대남공작 전담 조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존 연락부 소속 대남공작과 인원들을 대체할 만한 인원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대남공작과 공작원들이 연례적으로 해 오던 대남 침투 훈련도 육상 침투 훈련을 중단하고 해상 침투 훈련만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지뢰를 해체하고 휴전선 철책을 돌파해 침투하는 훈련을 해마다 했는데 이때부터는 이를 중단하고 수영과 잠수 등 해상 침투에 필요한 훈련만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KAL기 폭파 사건의 또 다른 진실
 
독자들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대한항공(KAL)기 폭파 사건과 관련된 내용은 당사자인 김현희의 자서전을 비롯해 이미 많은 증거 자료가 공개되고 발표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사건 자체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북한이 당시 왜 KAL기 폭파를 감행했는지, KAL기 폭파 사건 이후 북한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선 북한이 왜 KAL기 폭파를 감행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88서울올림픽의 파행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부 사람은 아직도 KAL기 폭파 사건이 1987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88서울올림픽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며 북한이 서울올림픽을 좌초시키기 위해 KAL기 폭파를 감행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이 왜 KAL기 폭파를 감행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KAL기 폭파를 감행한 시점과 서울올림픽 개최 시기를 연관시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이 KAL기 폭파를 감행한 정확한 날짜는 1987년 11월29일이다. 88서울올림픽이 1988년 9월17일에 개막되었으니 올림픽 개막을 9개월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올림픽을 9개월 앞둔 시점은 세계 각국에서 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들이 대회 일정에 맞추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막판 준비에 집중할 때다. 그리고 각국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대표단과 선수단 인원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그들이 이동할 항공편과 체류할 호텔 등을 사전에 예약하는 등 실무적인 준비에 들어가는 시점이다. 바로 세계 각국의 올림픽위원회와 선수들이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한 막바지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는 결정적 시점에 북한이 KAL기 폭파를 감행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는 대한민국은 섬이 아니지만 바다와 휴전선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섬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올림픽 선수단이 서울에 오려면 반드시 비행기를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들이 타고 이동해야 하는 항공편이 안전하지 못하다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올림픽 참가를 포기하거나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올림픽이 열리는 서울 시내에서 대규모 폭파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하는 등 신변 안전이 우려된다고 판단되면 선수들은 올림픽 참가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이 점을 북한이 노린 것이다.
 
말하자면 북한이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에 KAL기를 폭파한 것은 세계 각국에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려 했다가 죽을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어 그들이 88서울올림픽을 보이콧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88서울올림픽이 아예 열리지 못하도록 하거나 최소한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만들어 대한민국의 위상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려는 것이 바로 김정일의 생각이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김현희 공작조를 통해 KAL기 폭파를 감행했음에도 세계 각국의 서울올림픽 참가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으면 제2·제3의 KAL기 폭파와 같은 강력한 테러를 또다시 감행하는 방식으로 극도의 불안을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이렇게 테러를 통해 극도의 불안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세계 각국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88서울올림픽을 보이콧하게 만들어 올림픽이 열리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김정일의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김정일은 KAL기 폭파범인 김현희가 소속되었던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에만 서울올림픽 파탄 임무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도 동일한 임무를 부여했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중앙당 연락부에서는 2개의 남파공작조를 선발해 그들에게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기 위한 테러 임무를 부여하고 실전과 같이 폭파 연습을 하도록 하는 등 준비에 돌입했다.
 
그들은 해외공작조와 달리 남한에 직접 침투한 후 당시 국제공항이었던 김포공항이나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잠실주경기장을 비롯해 수많은 시민이 모이거나 왕래하는 서울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 가운데 하나를 폭파해 선수와 관광객이 마음 놓고 서울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경기에 참가하지도 못하게 함으로써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려 했다.
 
그런데 ‘불행 중 천만다행’으로 안기부에서 김현희를 검거한 다음 그를 통해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냄으로써 그 후 제2·제3의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하면 당연히 북한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될 상황이 조성되었고, 그렇게 되자 김정일은 테러의 방법으로 서울올림픽을 좌초시키려던 계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규탄하는 등 북한에 대한 국제적 여론이 나빠진 것도 김정일이 테러에 의한 올림픽 파탄 계획을 철회하는 데 한몫했다.
 
당시 김정일이 제2·제3의 KAL기 폭파를 취소하면서 이를 준비했던 연락부 소속 남파공작원들은 88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국내에 침투해 간첩망을 구축하는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년 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년 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 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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