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야구계의 거성 김성근(83) 감독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인생은 순간이다’를 읽었다. 읽는 내내 김 감독이 뒤에서 검(劍)을 들고 서 있는 듯한 서늘함을 느꼈다. 마치 사무라이가 할복할 때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쳐주는 보조자의 존재처럼, 한마디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책이다. 재일교포 출신 사무라이의 자기관리서이자 승부사의 조언서인 또 하나의 손자병법이랄까, 한국 야구계에 평생을 바친 사무라이의 생애를 그린 영화 같기도 했다.
김 감독의 인생역정 자체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다. 투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몸을 혹사한 나머지 1970년 비교적 일찍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팔순의 지금도 남들 시선 신경쓰지 않고 아마추어팀 ‘최강 야구’를 이끌며 운동장에서 배트를 휘두른다. 1942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재일교포학생 모국 방문 경기 참석차 처음 대한민국 땅을 밟았고 1960년 재일교포 성인구단 방문 경기 후 동아대학교에 스카우트 됐다. 1964년 일본에서 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 거주권을 포기하고 영구 귀국한다. 한·일 국교정상화(1965) 이전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던 시절이라 홀어머니·형제자매 등 혈육과 친구들 모두와의 생이별을 의미했다.
그의 삶에서 일본 사무라이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무라이 한자 표기가 ‘선비 사(士)’다. 1984년부터 약20년간 5000엔 지폐 인물이던 니토베 이나조의 1900년 영어 저술 ‘무사도’는 사무라이를 통해 일본 특유의 윤리관·사생관·직업의식을 설명한 책으로 유명한데,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고상한 계층의 본질을 짐작하게 해준다. 목숨보다 명예를 중히 여긴다는 게 뭔지 사무라이의 할복만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
할복이란 공개된 형태로 이뤄지는 공적 퍼포먼스의 측면,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의지로 죽음을 단행한다는 점에서 여느 자살과 차원이 다르다. 절명에 이르기 직전엔 육신이 저절로 삶을 부여잡으려 저항을 하기 마련인데 할복은 그것마저 스스로 끊어내야 한다. 단단히 훈련된 가치관 없인 불가능하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무라이의 미덕’을 본 일본인들이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덕분에 당시 일본인 교도관을 통해 안 의사 휘호 등 유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김 감독은 야구를 위해 한국을 선택한 셈이다. 재일교포 유도 선수 추성훈의 경우 거꾸로 일본 국적을 취득했지만 유도를 위해서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결단이 사무라이적 동질감을 보여준다. 고국을 향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결정한 한국행이었지만 추 선수는 실업팀에서 출신과 파벌의 벽을 넘지 못해 고전했다. 이긴 경기를 하고도 여러 번 판정패를 당하자 유도를 위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고 큰 업적을 이뤘다.
필자는 일본에서 33년간 살면서 제3의 국민성을 관찰하게 됐다. 재일교포들 가운데 혈통적·감성적으로 한국인이지만 한국과 일본을 공유하며 탁월함을 발휘한 사람들이다. ‘일본인과 다르다는 정체성’이 뚜렷하면서도 일본인 특유의 정직함과 장인정신, 흔들리지 않는 직업윤리 등을 지닌 재일교포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인들에 비해 공적인 영역을 중시하는 자세 역시 사무라이 전통에 가깝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10대 때 피를 토하며 입원한 아버지를 두고 중학교를 중퇴한 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도 그렇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사무라이적 비장함과 결단 같다.
물론 이런 측면이 태평양전쟁에선 전체주의로 드러나 서구 사회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일본 패망 직전 20대였던 일본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 ‘라이프’ 오너의 TV 증언을 기억한다.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편도 기름만 넣고 자폭 비행을 하기로 돼 있던 상황에서 어머니가 사정을 알고 면회를 왔으나 평소 수준의 안부 인사만 나누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울고불고하진 않더라도 눈물지으며 작별하는 장면 정도는 벌어지기 마련이다. 사무라이적 결기가 남성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설이 된 400년 전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대개 사무라이 정신을 그저 매사에 죽음을 각오하는 것쯤으로 여기지만 모든 백성이 의리를 알고 수치를 생각하며 죽음을 각오하는 것엔 차이가 없다.”
김 감독의 자서전 곳곳에서 일본 특유의 직업관과 철저한 자기 관리가 묻어난다. 늘 죽음의 대결을 준비하는 사무라이처럼 철저하다. 김 감독 인생을 통들어 한국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지만 태어나 약 20년간 자란 땅은 일본이란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암 수술을 앞뒀을 때도 가족과 팀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주변정리를 했다고 한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무림의 고수들과 결투를 위해 떠날 때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듯이. 죽음을 대하는 일본적 단호함·담담함을 신불습합(神仏習合) 즉 만물에 신이 내재한다는 토테미즘·애니미즘과 윤회적 가치관 융합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인이면서 일본적 강점을 겸비한 김 감독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1세대 재일교포 선배님들이 고국의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하면서도 ‘쪽바리’ 비칭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김 감독의 한국생활 또한 결코 녹녹치 않았다. 지금보다 더 배타적·폐쇄적이던 한국에서 수많은 편견과 이단아 취급을 견디며 자기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그의 삶에서 확인되는 프로 근성과 꿋꿋함이야말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1946년 창립 이래 숱한 시대적 정치적 위기를 넘어 존재해 온 저력과 통하는 기질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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