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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2] 아기, 엄마, 희숙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27 06:30:49
 
 
희숙이 변태섭의 아이를 가진 건 두 차례였다. 1학년 겨울, 2학년 가을. 처음 몇 번은 질외사정을 했고 콘돔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 생리주기가 정확한 희숙이 콘돔 사용을 꺼리는 변태섭을 위해 배란일을 피해 관계를 갖는 방법을 택했다.
 
배란일이 되면 희숙도 성욕을 느꼈다. 콘돔이 준비 안 된 어느 날 질외사정을 시도한 게 임신이 되었다. 희숙은 만감이 교차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 기쁨과 미혼모·출산·낙태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했다. 혹시, 낳자고 할지도 몰라. 희숙은 임신 전에 감기약이라도 먹었는지 돌이켜봤다.
 
아버지가 임신 소식을 알게 되면 반응이 어떨지도 생각했다. 학교는 그만두어야겠지. 그런 갈등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변태섭은 무안하리만큼 냉정하게 정리해 줬다. 희숙이 임신 소식을 알리자 변태섭은 10만 원을 구해 주곤 병원엔 혼자 가, 미안하다는 말만 건넸다.
 
희숙은 신촌 로터리에서 동교동 가는 길목 언덕에 있는 산부인과로 갔다. 최영희 산부인과. 간판이 여자 이름이어서 들어간 곳은, 남자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임신 8주 지났으니 석 달째 들어가고요, 낙태할 거면 지금 수술 결정해야 해요. 망설이다 배 불러 오면 수술하기 힘들어요. 다섯 달만 되어도 아이 태동이 느껴져요.
 
태동이라는 소리에 희숙은 울컥했다. 변태섭의 아이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었다. , 가능하면 빨리 수술해 주세요, 낳을 처지가 아니에요. 의사는 희숙의 얼굴을 보지 않고 동사무소 공무원처럼 말했다. 오늘 수술이 없는데 할 수 있으면 오늘 하든지. 준비가 안 됐다고 하자 의사는 환자가 준비할 건 결심뿐이라고 말했다.
 
다리를 벌리고 수술대에 오른 희숙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의사는 상담할 때 무심했던 태도와 달리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했다. 많이 떨리지요? 걱정 말아요. 금방 끝날 거니까. 수술실은 냉기로 가득했다. 의사에게 몸이 춥다고 말하는 순간 잠이 들었다.
 
나이 든 간호사가 깨웠을 때 눈을 떠 보니 회복실이었다. 온돌로 된 회복실 방바닥은 뜨끈뜨끈했다. 간호사는 집에 갈 시간인데 보호자가 없냐고 물었다. 희숙이 대답을 안 하자 간호사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낙태도 출산과 같은데 보호자가 늦게라도 왔어야지.”
 
간호사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며칠 동안은 미역국을 먹으라 했다. 희숙은 주섬주섬 코트를 챙겨 입고 8시가 다 돼서야 병원을 나왔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마취가 덜 풀렸는지 입에서 단내가 나면서 어지럼이 느껴졌다. 눈길에 미끄러질까 봐 비탈길 옆 가로등에 기대어 잠시 쉬는데 뱃속 아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생각났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흐르는 눈물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변태섭에 대한 서운함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독하게 외롭고 슬픈 겨울 저녁이었다. 두 번째 임신 소식에 변태섭은 돈을 건네주면서 짜증 섞인 볼멘소리를 했다. 여자가 피임 같은 건 알아서 해야지. 두 번째 임신은 확실히 희숙의 실수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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