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3] 낙태 그리고 자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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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28 06:30:24

첫 소파 수술 후 희숙은 경구용 피임약을 복용했다. 경구용 피임약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부작용이 심했다. 구토와 멀미가 끊이지 않았다. 약을 잠시 끊은 사이 일이 벌어졌다. 두 번째 임신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희숙은 심한 구토 증세로 친구들에 의해 양호실로 옮겨졌다. 이후에도 몇 차례 같은 증세로 양호실을 드나들었다. 양호실 간호과 교수가 임신한 거 아닌지 물었지만 생리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임신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경구용 피임약 복용 중에도 구토와 멀미가 잦아 임신으로 인한 구토라고 믿지 않았지만, 생리가 멈춘 후에야 두 번째 임신이란 걸 알았다.

임신 문제가 아니었다. 희숙의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위장과 신장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불안정한 식습관에 기인한 영양실조·스트레스였다. 두 번째 낙태 수술 후 건강 악화가 심해져 희숙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희숙은 2학년을 마치고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변태섭의 외면은 지독했고 잔인했다. 두 번이나 임신하고 수술했는데도 아기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거나 희숙의 아픔에 동요하지 않았다. 희숙이 건강 문제로 휴학하겠다, 말을 했을 때도 반응하지 않았다. 억지로나마 걱정하거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 좋을 텐데 변태섭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뭉칫돈을 주면서 옷이나 사 입어. 춥게 입고 다니지 말고, 정도로 마무리했다.

희숙은 몹시 서운했지만 옷 사 입으라 돈 주는 게 변태섭의 애정과 위로의 어색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무뚝뚝한 부산 남자들이 원래 그렇지. 아버지는 변태섭과 자주 만난다고 하니까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변태섭에 대한 아버지의 신임은 두터웠고 변태섭을 마치 큰사위처럼 생각했다. 아버지는 뭐든 변태섭이 하란 대로 하면 문제없을 거라며 변태섭에게 의지할 것을 당부했다.

희숙은 변태섭이 가끔 던져 주는 뭉칫돈을 자기 옷 사는 데에 쓰지 않고 아버지와 두 동생, 막내 희재의 옷을 장만해 보냈다. 그러면서 식구들에게 변태섭이 사 준 거라 했다. 변태섭이 준 돈은 맞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 변태섭이라카믄 내는 안심이데이”

희숙이 자퇴한 사실을 가족은 알지 못했다. 희숙에게 학교 졸업은 중요하지 않았다. 희숙이 동지들과 함께 임무를 완성하고 나면 세상은 바뀌어 있을 거고, 아버지는 공평한 세상을 맞게 된다. 그때 가서 털어놔도 된다고 생각했다. 변태섭과 함께 만든 세상을 아버지께 보여줄 생각이었다. 희숙은 그날이 오면 변태섭의 아이를 당당히 가지겠노라 마음먹었다.

변태섭이 희숙에게 이러저러한 이야기는 안 해도 희숙이 변태섭을 만날 때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조심스레 꺼내면 변태섭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다만 가끔, 그는 프랑스혁명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미나를 통한 지적 작업은 지식과 권력, 인간의 가슴과 뇌 사이를 동요하고 투쟁하는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문명화 작업이라고.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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