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54] 바람에 흔들리는 하늘하늘한 꽃잎 ‘아네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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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모네는 ‘오색’ 꽃 피우는 구근 식물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3-31 09:25:09

▲ 구근 식물인 아네모네는 봄에 보라·분홍·흰색·빨강·파랑 등 ‘오색’ 꽃을 피운다. 윤상구 사진작가

아네모네라는 꽃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동풍의 신 에우로스 △서풍의 신 제피로스 △남풍의 신 노토스 △북풍의 신 보레아스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 ‘아네모이’로부터 유래됐다.

아네모네는 하늘하늘한 꽃잎이 바람에 유난히 쉽게 흔들려서 ‘바람꽃’이라고도 불리는데 바람의 신들 이름이 붙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구근 식물인 아네모네는 겨울 동안 알뿌리에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봄에 보라, 분홍, 흰색, 빨강, 파랑 등 그야말로 ‘오색’ 꽃을 피운다. 아네모네는 밤이나 비 오기 전에 꽃을 오므리고 해가 나면 활짝 피어난다. 유럽에서는 아네모네를 ‘요정의 집’이라고도 부르는데 밤이나 비 올 때 꽃잎을 오므려 요정들이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상상에서 온 별명이다.

신화 속 아도니스의 핏자국에서 피어난 꽃

아네모네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아도니스’가 죽은 후 남은 핏자국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한다. 아도니스의 어머니는 미르라이다. 그녀의 미모를 시샘한 여신의 저주로 미르라는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나중에 상황을 알게 된 미르라의 아버지는 수치심에 딸을 죽이려 하지만 미르라는 신들의 도움으로 몰약 나무로 변신했다. 미르라 뱃속에 있던 아기는 열 달 후 몰약 나무 껍질을 뚫고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바로 아도니스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아프로디테가 갓 태어난 아도니스를 발견하고 자신의 아이로 키웠다. 사냥을 좋아했던 아도니스는 큰 짐승을 조심하라는 아프로디테의 당부를 잊고 커다란 멧돼지를 쫓다가 그 엄니에 받혀 죽었다. 슬픔에 잠긴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의 시신에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를 부었다. 그러자 시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아네모네 한 송이가 피어났다고 한다.

아도니스 이름은 ‘아도니스 콤플렉스(Adonis complex)’라는 심리 용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병적인 나르시시즘으로 분류되는 아도니스 콤플렉스는 남성들이 외모에 집착하여 생기는 강박 관념이나 우울증 따위를 말한다. 이는 미국 심리학자 해리슨 포프가 만든 개념으로, 심각한 ‘신체 변형 공포증’을 말한다.

사회적 신드롬 ‘아도니스 콤플렉스’의 어원

▲ 아네모네는 하늘하늘한 꽃잎이 바람에 유난히 쉽게 흔들려서 ‘바람꽃’이라고도 불린다. 윤상구 사진작가

아도니스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을 ‘아도니스 맨’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특히 근육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근육을 불리기 위해 가학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몸을 혹사하고 거식증이나 성형 중독으로 고통받기도 한다. 이렇게 ‘죽도록’ 애쓰지만 아도니스 맨은 대개 자존감이 낮아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보다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질투하고 심한 열등감과 우울감까지 느낀다.

1987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 분)은 전형적인 ‘아도니스 맨’이다. 27세인 그는 명문 사립고를 거쳐 하버드대학교 MBA를 졸업한, 월스트리트 금융 회사 과장이다. 이른바 ‘잘 나가는 미국 상류층’의 일원인 베이트만은 얼굴도 잘 생기고 육체 조건도 탁월하지만 자신의 외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외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도니스 맨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만드는 헬스로 하루일과를 시작하는 베이트만은 피부 관리, 값비싼 브랜드 옷과 향수를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명함도 최고급 종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겉으로는 교양과 품위를 갖춘 ‘신사’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고급 식사 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토막 살인을 저지르는, 잔인한 살인마다.

이 영화에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했던 1980년대 미국의 젊은 상류층 모습을 풍자한 블랙 호러 코미디’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80년대는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을 지낸 시기이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베이트만이 TV에서 방영하는 로널드 레이건의 연설을 시청하는 설정도 시대상을 나타내는 요소 중 하나다.

미국 워싱턴주립대학 교수 수전 제퍼드는 저서 ‘하드 바디: 레이건 시대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남성성’에서 “레이건 시대는 몸의 시대였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하드 바디’는 힘이 있고 강도 높은 노동이 가능하며 결단력·충성심·용기로 충만한 몸이다.

제퍼드는 그 무렵 발표된 ‘록키’와 ‘람보’ 시리즈와 ‘슈퍼맨’ ‘레이더스’ ‘터미네이터’ ‘탑건’ ‘리쎌 웨폰’ ‘다이하드’ 등이 하드 바디를 구현한 영화라고 했다. 근육질 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이 흥행몰이를 한 것도 이 시기였다.

아네모네 꽃은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리는, 유난히 연약한 꽃이다. 비록 신화로부터 나온 이야기이지만 그 연약한 꽃과 ‘하드 바디’를 추구하는 아도니스 맨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어찌 보면 겉모습 치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남성이야말로 텅 비어 있는 내면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어느 누구보다 나약한 존재일지 모른다. 1980년대에는 ‘하드 바디’가 조명받았다면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남성들은 어떤 모습을 주로 추구하고 있을까?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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