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돌아가신 것도 모르는 채…
간부 현실체험이 끝난 다음 나는 부서의 승인을 받아 두 번째 휴가를 갔다. 이때는 황해남도 당위원회에서 특별히 볼보 승용차를 내주어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아마도 첫 휴가 때 도당에서 차를 보장해 주지 않아 고생했다는 나의 말을 담당 지도원이 기억하고 있다가 도당에 강조했던 모양이다.
사실 2년 전인 1986년 초에 첫 휴가를 갔을 때 할머니가 몹시 위중한 것을 보고 왔기 때문에 그다음 해인 1987년 초에 다시 휴가를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안남도 평성에서 간부 현실체험을 할 때 보안 규칙을 어기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도당 초대소로 불러서 만난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할머니께서 1986년 5월14일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할머니의 임종 소식도 모르고 지켜보지도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무덤에라도 찾아뵙고 싶어 간부 현실체험을 마치고 돌아온 후 휴가를 신청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할머니 무덤 앞에서 눈물 쏟아
막상 휴가를 받아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동생들이 반겨 맞아 주었지만 당장 문밖까지 달려 나오셨을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너무도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애지중지 키워 주신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남동생과 함께 할머니 무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의 무덤은 6·25 전쟁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무덤과 함께 조상들을 모신 선산이 있는 내 고향 광탄리에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과산리에서 광탄리까지 지름길을 따라 가면 10km 정도 되는 거리였다. 이용할 교통수단이 부족해 아침에 남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 산소에 찾아가 술을 한 잔 부어 놓고 절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평생을 손자들인 나와 형제들을 업어 키우느라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무엇 하나 보답해 드린 것이 없어 눈물이 쏟아졌던 것 같다.
오해로 시작돼 해프닝으로 끝난 결혼 약속
두 번째 휴가 때는 앞에서도 짧게 이야기했지만 첫 휴가 때 잠깐 만나 대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자 동창생과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간 지 3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지난번 휴가 때 동창생 순옥이와 어떤 약속을 하고 갔느냐?”고 물었다.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러냐고 반문하자 “순옥이와 앞으로 결혼하자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냐?”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런 약속을 했으면 부모에게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섭섭한 표정까지 짓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첫 휴가를 다녀가고 얼마 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모교의 중학교 교사로 임명받아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가 평양에 가 있는 당비서 아들과 자기 딸이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니며 어머니를 만날 때면 벌써 사돈이 다 된 것처럼 대하더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인 내가 결혼과 관련된 중대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확한 사실관계도 모르면서 무작정 부정하기도 난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편지조차 마음대로 주고받지 못하는 곳에 있으니 확인해 볼 방법이 없어 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2년 전 첫 휴가 때 그와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며 나눴던 말이 생각났다. 헤어질 당시 그가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없겠다며 서운한 감정을 표시해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로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내 대답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 마치 내가 자기와 결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부모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자 그의 부모는 평양에 사는 당비서 아들과 자기 딸이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그때 나누었던 대화 내용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 말하며 그런 중요한 문제를 부모님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처리하는 그런 아들은 아니니 마음 놓으시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 후 어머니는 순옥이의 부모를 만나 나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을 들은 그들이 나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 보겠다며 집으로 찾아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직속 부하에게 모함당한 아버지
두 번째 휴가 때는 우리 집안에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신상과 관련된 문제였다.
휴가 기간을 사흘 남겨 놓은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평소와 달리 말씀이 없고 어머니 또한 분명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참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어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몇 번 망설이다가 그만두려고 했는데 내가 물어보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아버지가 지금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써 놓았던 여러 장의 편지를 내놓았다.
편지에는 아버지의 직속 부하인 초급 당 부(副)비서 등 몇몇 사람이 아버지를 모함하려고 했던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편지를 썼다며 그 편지를 도당(道黨)이나 중앙당에 보낼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아버지가 출신 성분이 나쁜 사람들의 문제를 잘못 처리해 보위부와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고, 그 문제로 상급 기관인 군당에 불려 들어가 추궁을 당하고 경고까지 받은 상태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 큰소리 한번 안 내고 언제나 따뜻한 인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말보다는 솔선수범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지역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던 아버지를 모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증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정말 당장이라도 잡아다 박살을 내 주고 싶을 정도로 분하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버지 문제를 권력으로 해결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내가 편지를 가져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이야기한 다음 휴가를 마치고 초대소가 있는 평양으로 돌아올 때 그 편지를 챙겨서 출발했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평양까지 가지고 와 담당 부부장이나 과장 등 중앙당 간부들에게 직접 전달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큰일을 할 사람이 사소한 문제를 들고 돌아다니며 간부들에게 매달린다고 하는 비난이 돌아올 것 같아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해주에 도착한 다음 도당에서부터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해주역까지 따라 나왔던 도당 11과 부부장에게 열차에 오르기 직전 그 편지를 전해 주며 말했다.
“사실 이 편지를 평양에 갖고 올라가 중앙당 연락부 담당 과장이나 부부장 동지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대남 부문 가족들의 생활 지원을 책임진 도당 11과가 욕을 먹을 것 같아 이렇게 부부장 동지에게 드리니 잘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양 초대소에 올라가서는 휴가 기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는 간부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내가 집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버지 문제는 그 후 약 1개월이 지나 모두 해결되었다. 아버지가 받은 경고가 해제되었고, 아버지를 모함하려던 초급 당 부비서는 다른 곳으로 전근시켜 아버지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물론 아버지 문제가 해결되어 좋기는 했지만 이것은 북한에서 노동당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공작조 조원이 되다
두 번째 휴가를 다녀온 후 4월 말경 또다시 다른 공작원과 공작조를 편성했다. 이때 나와 같은 공작조로 편성된 사람은 양강도 보천보가 고향인 김명걸이었다.
김명걸은 당시 나보다 서너 살 많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키가 170cm가량 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원래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다가 부모님이 너무 아파 병간호를 위해 대학을 자퇴한 후 군(郡) 사로청 지도원을 하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양성반 3년제를 졸업하고 노동 단련을 마친 상태라고 했다. 연락부에서는 김명걸이 사회에서 사로청 지도원을 해 보았기 때문에 간부 현실체험은 생략했다.
어쨌든 그가 1986년 가을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했으니 당연히 나보다 1년 이상 후배였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입학 연도를 따지면 나보다 2년 후배였다. 그러나 담당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서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에서 사로청 간부를 했던 경력을 내세워 그를 공작조 조장으로 임명했고 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또다시 공작조의 조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북대천 9호 초대소에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있던 북대천 10호 초대소로부터 약 300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공작조가 편성되면서 내가 조장 김명걸이 생활하고 있던 9호 초대소로 이사 갔다. 그로부터 약 2개월 동안 9호 초대소에서 생활했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초등학교 때 체험학습 신청서를 저만큼 많이 제출한 친구가 드물었을 정도로 아버지는 저희와 많은 시간을 보내 주셨어요. 하지만 또 반대로 어린 저와 동생에게 엄격한 규칙들도 만들어 놓으셔서 어떨 땐 그걸 피해 보려고 잔머리 굴리다 더 무서운 엄마에게 걸려 엄청 혼난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된 후 제 자식들이 ‘자유’에 대해 물어 온다면 어떻게 정의를 해 주어야 할까요? 아버지 삶의 절반은 ‘자유’가 없는 곳에서, 나머지 절반은 저희 아버지로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오셨는데, 저에겐 아버지가 정의 내려 주시는 ‘자유’가 그래서 더 의미 있고 소중합니다.
아버지 : 내가 살아오면서 ‘자유’라는 단어처럼 소중하게 생각한 건 없는 것 같아. 네 말처럼 나는 자유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북한 땅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고, 인생의 후반기는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았으니까….
일반적으로 자유는 ‘양심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지금 생각하는 자유는 ‘사람 또는 사회로부터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자유’라고 하는 철학적·정치학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가 쉽지는 않아. 그렇지만 북한 김정은 체제는 생존권을 비롯한 인간의 기초적인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하는 사회이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시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사회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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