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땅의 경상도 사나이들
적구화 교육 당시 경상도 말과 문화를 가르친 경상도 사나이가 여러 명 있었다. 그중 내가 아는 사람은 차 선생과 권 선생·공 선생, 남파 공작원 출신의 한 선생과 최 선생 등이다.
차 선생은 경상도 사투리 중에서도 경상남도 말을 가르쳤다. 대남공작부서 내부의 원칙에 비추어 분명 ‘차’씨라는 건 가명의 성씨일 텐데, 나는 그의 본래 성씨를 모른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175~180cm의 큰 키에 몸무게도 80kg 이상으로 거구였다. 원래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던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부산에서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남파되면 딸을 찾아봐 달라던 차 선생
그에게서 경상도 말을 배웠던 조장 권중현은 그가 어선 선장이었으며 그와 함께 배를 탔던 선원도 북한에서 살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권중현의 말대로 그가 바다 사나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상당히 크고 성격도 급했으며 쌍욕도 아주 잘했다. 정확히 그가 어떻게 북한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권중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다가 납북된 후 북한에 머물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진해서 북한에 남게 되었는지 아니면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북한에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권중현과 내가 1990년 5월 함께 남파될 때 권중현에게 찾아와 자기 딸을 찾아봐 달라고 조용히 부탁한 적이 있다. 나와 권중현이 이선실과 접선한 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살 때 권중현은 ‘차 선생의 딸이 서울 강남 지역 어디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수첩에 메모해 온 전화번호를 가지고 찾아보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운동권 출신의 권 선생 “반정부 투쟁의 발원지는 대구”
권 선생은 대구 사람으로 170cm 중반의 비교적 큰 키에 마른 체구였으며 1987년 당시 50대 중반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195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던 진보당 청년 조직에도 관여한 적이 있다고 하며 광산을 경영하다가 부도가 났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그는 남한에서 반정부 투쟁의 발원지는 언제나 대구였다는 점을 늘 자랑하고 다녔으며 대구 경산에는 사과가 많고 따라서 미인도 많다는 말을 항상 했다. 또한 “한국에 살 때 만난 아내가 수재였다. 그래서 아이들도 수재였다.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3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였다”며 자기는 다윈의 진화론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공 선생은 1987년 당시 40대로 160~165cm 정도의 비교적 작고 왜소한 편이었으며 경상북도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아는 게 없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양성반 동기생 가운데 일본 공작과에 배치받았던 조성렬이 일본어를 배운 뒤 다시 공 선생으로부터 경북 사투리를 배웠던 관계로 그 친구와 함께 한 번 본 게 전부라서 얼굴 생김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라도 출신의 춤 강사 황 선생
황 선생은 적구화 교육 당시 내가 만난 유일한 전라도 사람이다. 그는 1987년 당시 30대 중반이었고 1980년대 초반 상선을 타고 제3국에 나갔다가 그곳에 있는 북한공관으로 귀순했다고 한다. 나중에 우연히 북한에서 발행한 잡지에 실린 황 선생 관련 기사와 사진을 보았는데 북한으로 입북할 때 그의 본명은 하영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본인 말로는 남한에 있을 때 가수 조용필을 따라다니며 밴드부에서 드럼을 쳤다고 항상 자랑하고 다녔다. 그의 노래 실력과 춤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아서는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정확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남파 공작원은 서울말과 경상도 말이 필수
흥미로운 점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파 공작원 가운데 70% 이상이 경상도 말을 배웠고 나머지 30% 정도가 서울말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경상도가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5~87년 2년간 남한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다 복귀한 2인 공작조가 한국에서 생활하기에 가장 편한 언어가 서울말, 즉 표준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비율이 역전되어 70% 이상이 서울말을 배우게 되었고 나머지 30% 정도가 경상도 말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전라도 말을 배우는 공작원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전라도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전라도 말을 배우는 공작원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황 선생은 적구화 교육을 받고 있던 공작원들에게 언어보다는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아직도 매일 아침 그가 내가 생활하던 초대소에 찾아와 커피에 달걀노른자를 타서 모닝커피를 함께 만들어 마시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국군 관련 강사 20대 후반의 마 선생
적구화 교육 기간 나를 가르쳤던 강사 중에는 고교생으로 납북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나는 검거될 때까지 나를 가르친 그들이 납북된 고교생들인지 몰랐다.
그 가운데 마 선생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당시 20대 후반에 미혼이었으며 공작원들에게 한국군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국군의 창설부터 군 구조와 각급 부대 현황, 병영 생활, 입대 및 제대 절차, 총검술 훈련 등 군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강의와 실습 등의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는 당시 내게 충청남도 천안이 고향이며 형제가 많다는 것, 그중에서 본인은 막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심성이 착한 데다 머리도 좋은 편이었고 6·25 전쟁을 겪은 세대는 더더욱 아니어서 그의 입북 경위가 대단히 궁금했다. 적구화 교육을 받는 동안 그와 비교적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대남공작기관의 비밀 준수 원칙, 즉 보안 수칙 때문에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러한 나의 궁금증은 남한에 와서야 풀리게 되었다.
마 선생은 납북된 ‘천안농고 이명우’
이후 검거되어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던 당시 수사관이 앨범을 들고 와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앨범에는 1970년대 중·후반 서해와 남해에 있는 해수욕장 또는 섬에 피서 갔다가 납치된 고등학교 학생들의 사진도 있었는데 찬찬히 보니 일부는 내가 적구화 교육을 받는 과정에 만났던 강사들이었다.
그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적구화 교육 강사 ‘마 선생’이었다. 그런데 사진 밑에는 ‘천안농고 이명우’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마 선생’이 ‘이명우’라는 이름의 천안농고 출신 납북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명우는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8년 친구 홍근표와 함께 전남 홍도에 피서갔다가 같이 납치되었으며 그 후 그의 부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명우는 적구화 교육 강사로 있으면서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그 후 북한 최고의 경제 간부 양성기관인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해 공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충청북도 진천경찰서에 강연하러 갔다가 이명우의 친형을 만나 그의 안부를 전해 주기도 했다.
환경관 강사는 이명우와 함께 납북된 홍 선생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홍 선생 역시 이명우와 함께 납북된 사람이다.
그는 천안 상고 출신으로 친구 이명우와 함께 1978년 여름 홍도에 피서갔다가 납북된 홍근표다. 홍근표는 납북된 이후 이명우와 함께 대외연락부 소속 강사로 공작원들을 직접 가르치다가 1980년대 후반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임명되어 이명우와 헤어졌다.
나는 적구화 교육 막바지에 서울말 강사인 박 선생, 이명우 등과 함께 적구화 환경관에 실습 갔다가 홍근표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내가 보았던 홍근표는 밝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슈퍼마켓 담당 강사 이민교, 납북된 고교생 출신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슈퍼마켓을 담당한 이 선생도 있었다. 실습을 위해 적구화 환경관에 가서 그를 몇 번 만나 대화를 해 보니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서울이나 경기도 출신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직접 물어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에 대해서도 검거된 후 알게 되었는데, 그는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7년 여름 홍도 해수욕장에 갔다가 납치된 ‘이민교’라는 이름의 고등학생이었다.
이발소·여관 담당 강사는 이민교와 함께 납북된 최승민
이 외에도 적구화 환경관에서 이발소와 여관 등을 담당하고 있던 강사도 이민교와 연배가 비슷했는데, 앨범 속의 사진을 보니 이민교와 함께 홍도에 놀러 갔다가 납치된 최승민일 가능성이 높다.
납북자 관련 얘기가 나온 김에 초대소에서 목격한 일본인 강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일본인 강사가 납북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20-2호, 120-21호 초대소는 일본어 교육 전문 초대소
적구화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평양시 순안구역 초대소 지역에는 대일공작과의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초대소도 있었다. 내가 적구화 교육을 받은 초대소 지역엔 전부 현지화 교육을 위한 초대소가 있었는데 그런 곳들에선 중국어·일본어·스페인어·영어 등의 외국어와 각국의 문화를 가르쳤다.
그중 120-2호 초대소와 120-21호 초대소는 일본어 교육 전문 초대소다. 2호와 21호 초대소에선 일본인 강사가 대일공작과 공작원과 함께 숙식하면서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친다. 말하자면 한국인 강사가 대남 공작원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적구화 교육을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일본인화 교육을 하는 것이다.
120-2호 초대소에는 일본말을 가르치는 ‘다나카’라는 이름의 일본인 남자가 있었다. 나는 이런 얘기를 일본공작과 공작원으로 그에게 일본말을 배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동창 조성렬로부터 들었다.
일본인 납북자 강사
조성렬은 1989년경에 공작원을 그만두고 제대했다. 그는 일본어를 배운 다음 남한 적구화 강사인 공 선생으로부터 경상북도 말을 배웠다. 그때 나와 만났는데, 그가 일본인 강사의 부인도 일본인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일본인 강사와 그의 부인이 어떻게 북한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시 그가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이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일본인이 자진해서 월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납북자로 추정된다.
내가 순안초대소 지역에 있는 2층짜리 특별초대소에서 생활할 때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다나카’라는 일본인이 우산을 쓴 공작원과 함께 걸어가는 옆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공작과에 있던 내 친구와 얘기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 170cm 정도의 키에 보통 체격이었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약간 기르고 있었는데 미남형이었다.
120-21호 초대소는 일반 초대소보다 규모가 큰 초대소였는데, 그곳에도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강사가 있었다.
대학 동창생 조성렬에 의하면 일본인 강사들은 북한 돈으로 월급을 받는 남한 출신 강사와 달리 엔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생활비로 받은 외화로 평양 시내 외화상점에서 외제 물품을 구매해 생활했으므로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다.
실제로 다른 초대소에서 생활할 때 창고에 빈 일본산 술병이 많아 요리사에게 물어보았더니 내가 초대소에 오기 전에 일본인 강사가 외화상점에서 사다가 마신 것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남한에서 자유의 몸이 된 후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면 자식들과 무엇을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으셨나요?
아버지 : 내가 아버지가 되면 가족과 함께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었어. 북한에는 여행의 자유가 없는 데다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아 내가 어렸을 때는 물론 그 후에도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없었거든.
그러다가 남파 공작원을 하면서 북한 전역을 거의 다 돌아다녔지만 금강산이나 백두산 관광을 제외하고는 즐거운 적이 거의 없었어. 주로 야간에 완전 군장을 하고 훈련하느라 걸어 다녔기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밖에 없어.
그래서 너희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자주 갔던 거야. 아마 너희 또래 가운데 너희들만큼 전국 방방곡곡 안 가 본 곳 없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들도 많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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