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苻堅)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진(前秦)의 3대 국군(國君)이다. 100만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나 군대가 통제 불가의 상태에 빠져 허망하게 패망하고 만다.
부견은 서기 357년 황제의 칭호를 없애고 대진천왕(大秦天王)으로 즉위했다. 그 자신이 티베트계 저족(氐族) 출신이었음에도 저족 호족들의 횡포를 억누르고 한족(漢族) 인재들을 중용했다. 태학(太學)을 정비해 학문을 장려했으며 농경을 중시해 활발히 일으켰다. 백성들은 너도 나도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擊壤歌)를 불렀다.
이를 바탕으로 국력이 급성장하자 주변국들을 차례로 공격해 영토를 늘려 나갔다. 무작정 정복 사업만 벌인 게 아니라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맺는 등 노련한 외교술도 펼쳤다. 372년에는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화북·중원 등이 평정되자 부견은 강남을 차지한 숙적 동진(東晉)으로 눈길 돌렸다. 동진은 그때껏 국지전에서 연전연패하던 신세였다. 부견은 373년 동진의 양주(梁州)·익주(益州)를 쳐서 손에 넣었다. 378년에는 동진의 양양(襄陽)이 1년간의 포위전 끝에 부견에게 함락됐다.
383년 부견은 마침내 대군을 소집해 동진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집결한 그의 병력은 약 ‘100만’에 이르렀다. 사실 부견이 그때까지 대규모로 거병하지 않은 이유는 “내부는 불안하고 적은 강하다”는 주변의 만류 때문이었다. 한족 출신으로서 누구보다 준비된 전쟁을 강조한 왕맹(王猛)이 사망하자 부견은 비로소 군사를 일으켰다.
부견과 동진의 군대는 비수(淝水)에서 마주쳤다. 동진은 전례가 없는 100만 대군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동진 측은 사자를 보내 “우리가 비수를 건너갈 테니 조금만 군사를 물려 다오. 이후 역사에 길이 남을 승부를 겨뤄 보자”고 요구했다.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며 자만하던 부견은 “오냐”라며 정말로 퇴각했다.
문제는 군령(軍令)이 각 군영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장병들도 각자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억지로 싸움터에 끌려나왔던 병사들은 일시 후퇴가 아닌 종전 선언인 줄 알고 고향 앞으로 전진했다. 설상가상 누군가가 “전진이 졌다!”고 소리치자 장졸들은 서로를 짓밟으며 무질서하게 달아났다. 부견은 피 터지게 외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결국 정말로 패해 비참히 눈 감았다.
대선에 임하는 국민의힘 일부 관계자들의 각자도생이 점입가경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일사분란하게 결속 중이다. 통제 불가 상태인 군대의 필패는 필연이다. 보수층의 한숨만 짙어진다.
오주한 정치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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