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은 ‘발명의 날’이다. 580여 년 전 세종 때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 시험한 날이다. 측우기 발명은 서양보다 200년 앞섰으니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면 우리 세대가 이룩한 성취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필자는 1992년 삼성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64메가 D램 칩을 꼽고 싶다. 이 칩은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을 정도다. 이로써 우리가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했다. 삼성은 1994년 256메가 D램도 최초로 개발, 8월29일, 즉 경술 국치일에 발표했다. 진정한 의미의 극일이다. 지금까지도 반도체가 우리 수출의 1/5 이상을 차지하니 엄청난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반면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1950년대에 반도체 개발을 시작해 1965년 최초의 집적회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중국은 문화대혁명때 유학파를 핍박해 중국 반도체 물리학의 창시자 쉬에시더(谢希德, MIT 박사)의 경우 화장실 청소를 했다. 그 이후로도 중국은 반도체 개발을 거듭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이 원유 수입액을 넘어서자 시진핑은 10년 전 ‘중국 제조 2025’ 플랜을 수립하고 기술 개발을 서둘렀다. 중국은 150조 원 규모의 반도체 기금을 조성하고 집중 투자해 파운드리 SMIC 등을 성공적으로 키워 냈다.
미국은 이러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적극 견제했다. 중국의 인공지능(AI) 산업 발전을 가로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중국의 AI를 눌러야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래학자 알빈 토플러가 지적했듯이 ‘부의 창출 수단’이 곧 ‘전쟁 수단’이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사람의 노동력이, 산업사회에서는 내연기관이, 정보사회에서는 컴퓨터가 부를 창출했고 전쟁의 승패도 결정지었다. 4차 산업시대엔 AI가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 AI 산업의 아킬레스건인 데이터 처리 반도체를 집중 공략했다. 이는 구글의 창립자 에릭 슈미트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안보 측면에서 미국의 AI 경쟁력을 평가한 ‘인공지능국가안보위(NSCAI) 보고서(2021)’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엔 일본의 반도체 소재·부품과 네덜란드산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 등의 대중 수출을 금지하고 한국과 대만으로 하여금 미국 땅 안에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짓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고 실제 시행 중이다. 요컨대 미·중 간 반도체 문제의 본질은 ‘기술 패권’이 아니라 ‘세계 패권’ 경쟁이다.
공교롭게도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은 한국·대만 등 동북아시아다. 이를 두고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세기 세계 경제의 조임목(choke point)은 원유 상당량이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었으나 21세기는 동북아시아라고 짚었다. 한국은 북한, 대만은 중국 본토로부터 위협받고 있으니 조임목이라는 표현이 더 실감난다.
우리 반도체 산업 발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감한 초기 투자와 이병철·이건희와 같은 걸출한 기업인, 전두환 대통령의 뒷받침이 있었다.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 시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반도체 기술을 얼마나 빨리 발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 후 어떤 지도자가 그만큼 반도체 산업 발전에 열의를 보였는지 모르겠다.
64K D램 개발 당시 삼성 개발팀 직원들은 정신 무장을 위해 무박 2일 64Km를 행군했다. 매일 밤 11시 ‘일레븐미팅’에서 상황을 점검했다. 한 엔지니어는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집에 가 봐야겠다고 상사에게 얘기했다가 “네가 애 났어?”라는 말을 들었고, 그 자신도 훗날 부하 직원이 결혼하러 간다니까 “이 바쁜데 결혼? 정신 있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지도자·경영인·엔지니어 각자가 맡은 바에 죽을힘을 다했다. 그리고 이뤄 냈다.
반면에 지금 우리의 자세는 너무 안일하다.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을 100여 차례 넘게 정치 재판받게 하고 실형 선고를 하지 않나, 주 52시간 근무제를 반도체에도 적용하지를 않나.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지 묻고 싶다. 엔비디아 직원들은 주 7일, 새벽까지 군말 없이 일한다고 한다. 높은 급여로 보상해 주기 때문이다. 일하고 싶은 사람 일도 못 하게 법으로 강제하는 우리나라가 한심하다.
대만 총통은 가뭄이 들어 반도체 공업 용수가 부족하면 농업 용수를 끌어다 주었다. 중국은 물론 미국·일본도 보조금·세제 혜택 등으로 반도체 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바야흐로 기술 민족주의가 풍미하는 시대다. 우리 나라에서만 반도체 클러스터용 송전선로를 끌어오는 데 환경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쇠파리 떼처럼 달라 붙는다. 서울의 위성도시 하나는 지금도 여전히 몽니 중이다.
정상배들이 ‘저녁 있는 삶’을 강조하며 표를 사고 있는데 이로써 우리 반도체가 경쟁력을 상실한다면 많은 사람이 저녁의 여유는커녕 삼시 세끼 마련도 급급한 삶에 직면할 것이다. 다음 달에 탄생할 신임 대통령이 잠자는 토끼 신세의 국민을 일깨워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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