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파 공작원의 성욕 해결 방법?
남한에 살면서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여러 가지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공작원들이 실제 남파되어 활동하는 경우 그 기간이 몇 개월 혹은 그 이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때 여자 문제, 즉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느냐? 특히 젊은 공작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신의 경우에는 어떻게 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답한다.
“사실 주머니에 돈도 많고 적구화 교육을 통해 술집이나 사창가에 가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웠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성욕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콘돔 사용법과 콘돔을 사용하면 기본적으로 성병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도 여자가 있는 술집이나 사창가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콘돔을 쓰더라도 재수가 없으면 성병에 걸린다고 하고, 그렇다면 에이즈도 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작원들은 남한이나 해외 현지에 파견되었다 복귀하면 반드시 정밀 신체검사를 하는데, 이때 성병에 걸린 것이 밝혀지면 자신의 명예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됩니다.
자존심 하나로 사는 공작원… 사창가엔 “안 가”
대남 공작원들은 자존심 하나 갖고 사는 사람들인데 간부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남조선 혁명을 잘하라고 귀한 당 자금을 공작금으로 주었더니 그 돈으로 계집질이나 하고 성병까지 걸려서 돌아왔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할 것이 아닙니까. 남들의 따가운 시선이 무섭고 자존심 상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 그것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사실 공작원들이 장기간 남한 또는 해외에 침투해 활동하는 경우 여자 문제, 즉 성생활 문제는 반드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작원들이나 담당 간부들 역시 여자 문제는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한 침투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이원국 부부장과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누가 먼저 꺼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남한에 침투해 활동하는 과정에 성적인 욕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대화가 오간 적이 있다.
사실 그전에 우연히 담당 간부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보다 먼저 남한에 침투했던 공작원들 가운데 퇴폐 이발소에서 성적인 서비스를 받은 공작원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 성행하던 터키탕이나 창녀촌 등에 갔다가 성병에 걸려 복귀한 공작원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거론된 것 같다.
성적 유혹에 빠질 경우 대비한 액션 플랜
현실적으로 장기간 남한 현지에서 활동해야 하는 남자 공작원들의 경우 반드시 이발을 해야 하는데, 이들이 어떤 곳에 가서 이발할 것이냐는 현지의 상황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 문제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간 곳이 퇴폐 이발소라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가 당연히 문제가 된다.
꼭 이발 문제가 아니더라도 피끓는 20·30대 청년 공작원들의 경우, 특히 결혼하고 가정생활을 하는 공작원이라면 남한에 침투했을 때 성적인 욕구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게 어쩌면 당연히 제기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유혹에 빠질 경우를 대비한 방안, 즉 액션 플랜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대남 공작원들이 적구화 교육을 통해 아무리 한국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다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부분, 특히 성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고 자의적으로 결론을 낼 수도 없는 것이 북한 대남 공작 세계의 현실이었다. 또한 남파 공작원도 인간이기 때문에 성적인 호기심이 있거나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해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퇴폐업소에 갈 수도 있으므로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조르게처럼 하면 된다”
특히 남파 공작원들의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이런 정도의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간부들에게 얘기할 수 있었고 덕분에 오히려 쉽게 해결되었다.
어느 날, 나와 조장 권중현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남한 현지에 가서 여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즉 성적인 욕구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원국 부부장은 한마디로 “조르게처럼 하면 됩니다”고 명쾌한 답변을 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정말 간단명료한 답변이었다.
나는 이미 공작원 생활을 하는 과정에 1961년 프랑스·서독·이탈리아·일본 합작으로 만든 영화 ‘조르게 씨, 당신은 누구요?(Qui êtes-vous, Monsieur Sorge?)’를 본 적이 있었으므로 구(舊) 소련의 전설적인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의 명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구(舊)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독일 국적이었던 조르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침투해 활동하던 소련 공작원으로,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중국을 침공했던 일본군의 공격 방향이 북쪽인 소련 극동지역이 아니라 인도차이나 쪽으로 남진할 것이라는 정보를 수집해 소련 수뇌부에 보고했다.
소련 수뇌부는 조르게가 보고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극동지역에 배치했던 수많은 병력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대독(對獨)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군이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레닌그라드 즉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결정적인 수적 우세를 차지함으로써 독일군을 격파하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여자를 공작에 활용하되 빠져들지 말라”
조르게는 독일 사람으로 동경 주재 특파원의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유능한 공작원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 일본군 고위 인물들은 물론 일본 주재 독일 대사·군사 무관 등 대사관 핵심 관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적극적으로 접근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 관계자들의 부인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며 추가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미 수집한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보충해 완벽한 정보를 생산해 소련에 보고했다. 말하자면 그는 임무 수행을 위해 고위급 인사 부인들과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는 등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정보 수집과 공작에 활용했다.
결론적으로 “조르게처럼 하면 된다”는 이원국 부부장의 말은 공작원들이 임무 수행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여자와 접촉하거나 성관계를 가질 수도 있으나, 그런 경우 여자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되 빠져들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청진까지 가서 한 통신 훈련
나와 조장 권중현은 담당 과장과 부과장·지도원들의 지원과 협조를 받으면서 대남 침투 및 공작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 즉 액션 플랜을 작성하는 한편, 실제와 같은 상황을 정해 놓고 하는 모의 훈련도 진행했다.
무엇보다 통신 훈련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남한 현지에 가지고 나가 사용할 3대의 무전기를 가져다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점검했다. 당시 우리가 3대의 무전기를 가지고 남한에 침투하기로 했던 것은 1대는 조장 전용, 1대는 조원 전용, 나머지 1대는 공작조 공용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권중현은 산속에 들어가 무전기를 설치해 놓고 암호 전문을 입력시켜 전파를 발신하는 방식으로 무전기가 야외에서도 이상 없이 작동하는지, 전파가 평양까지 제대로 도달하는지 등을 확인하는 통신 훈련을 진행했다.
이러한 통신 훈련은 남한의 가장 남쪽 지역과 평양과의 거리를 염두에 두고 함경북도 청진까지 무전기를 가지고 열차로 이동한 다음 그곳 산속에 무전기를 설치해 놓고 평양을 향해 전파를 발신한 후 평양에서 숫자 방송(난수 방송)을 통해 보내오는 암호 전문을 수신해 변신(해독)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처음 쏴 본 브라우닝 권총
또한 권총 실탄사격 훈련도 진행했다. 당시 우리가 침투할 때 휴대하기로 한 무기는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과 4각 수류탄이었다.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은 실탄 6발이 들어가는 탄창식으로 손바닥에 감출 정도로 작은 데다 소음기를 장착하고 실탄을 발사하면 대나무 막대기로 나무 문짝을 때리는 정도의 작은 소리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아무리 현직 공작원이라도 평상시 실탄 사격훈련을 할 때는 브라우닝 권총을 비롯해 실제로 남한에 침투할 때 휴대하는 무기는 사용하지 않고 주로 북한에서 제작한 권총을 가지고 훈련을 진행한다. 따라서 나는 그때 우리가 휴대할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을 처음 보았으며, 그것을 가지고 실탄사격 훈련을 해 보면서 위와 같은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4각 수류탄도 실제로 투척하고 그것이 폭발하는 것을 관찰하기도 했다.
7부·8부 능선 가로질러 야간 산악 이동
이와 함께 실제 침투 시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에서 서귀포 KAL호텔까지 이동하기로 했으므로 이 지역과 유사한 곳을 정해 놓고 야간에 이동하는 훈련도 진행했다.
남한에 침투하는 공작원들은 산악으로 이동하는 경우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 산 능선이나 정상을 따라 이동하지 않고 7부나 8부 능선으로 가로질러 이동한다. 따라서 침투 지역인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에서 서귀포 KAL호텔까지 이동하는 훈련도 동일한 상황에서 진행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이어서 산 중턱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는 검거 후 3년 반이 지나서야 자유의 몸이 되셨다고 들었는데, 그때 어디를 가장 먼저 가고 싶으셨나요? 자유롭게 된 그 순간, 오롯이 아버지 혼자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던 건가요?
아버지 :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이나 탈북인들은 고향이 그리울 때면 임진각에 가서 북녘땅을 바라본다고 해.
그런데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솔직히 혼자서 어디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특별히 가고 싶은 곳 또한 없었어. 차라리 그냥 며칠이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마음 놓고 푹 자고 싶었어.
그리고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신변 보호 담당관이 항상 붙어 있어서 나 혼자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물론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면 신변 보호 담당관과 같이 갈 수는 있었겠지.
중요한 것은 내가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국정원을 비롯해 여기저기서 내게 초빙 강의 또는 강연을 해 달라는 제의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 매일 같이 강의와 강연을 하러 다녀야 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자유롭게 됐을 때는 설사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하더라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여기에다 자유의 몸이 된 지 한 달도 안 돼서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에 출근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해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어. 사실 난 자유의 몸이 될 때 이미 기무사에 특채로 취직한 상태였거든.
대신 결혼을 하고 너희들이 태어난 다음에 엄마랑 너희들을 데리고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마음 놓고 다녔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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