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고? 속이면 사기지. 사기당해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라니 이게 무슨 변태 새끼 같은 소리냐?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말해 줄까. 삶이 나를 속여서 그래. 노동자들하고 생활하니까 노동자 마인드가 되더라. 노동자들하고 생활하니까 노동자 습관이 몸에 배더라. 더 달라고 떼쓰는 법만 배웠어. 어떻게 하면 자본가 약점 잡을까 연구하게 되고 열심히 일 안 해도 돈 버는 방법만 터득하게 되더라니까. 노동운동한 것 중에 직원 부리며 돈 벌어본 놈 있나. 구멍가게라도 해 본 놈 있냐고, 없어. 내가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노동자 권리 찾겠다고 노조 만들고 여성위원장도 하고 다 했는데 결국 저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거기서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만 봤어. 대를 물려서 해 처먹는 거 보면서 저게 민주고 해방이냐 싶더라.
그런데 더 슬픈 건, 그만둘 수 없더라고. 거짓이고 위선인 줄 알았을 땐 내가 멀리 와있더라. 적당히 왔을 땐 돌아가기라도 하지 너무 멀리 왔어. 알면서도 못 가. 억울해서 못 가고 놔주지 않아서 못 가. 공동체가 돼 버리면 더 못 가. 그래서 변태섭한테서 도망 못 가고 사는 거야. 전화 못 받으면 난리 나지. 감히 자기 전화 안 받았다고. 변태 새끼가 인터뷰한 거 봤다고 했니? 우리 사회에 관용이 사라졌다고? 삶은 소대가리가 웃을 일이지. 집에서 물 한 잔도 자기 손으로 갖다 마시지 않아. 나는 집에서 하녀고 몸종이고 노예야. 무슨 관용 같은 소릴 하고 자빠졌어. 내가 필요한 거였어. 내가 만만하니까. 어차피 나하고 잠자리도 안 해. 더럽다고 생각한 거지. 딴 데 가서 풀겠지.
이 새끼가 한 짓은, 절개를 잃고 돌아왔다고 환향녀라 손가락질한 조선 양반놈들보다 더 나빠.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개같이 충성한 것밖에 없는데 화장실 휴지 취급하더라니까. 내가 왜 변태 새끼라고 한 줄 알아? 진짜 변태거든. 섹스할 때 나한테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서 실험하더라. 어디서 보고 왔는지 들었는지 별 희한한 걸 다 요구하더라고. 내가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는지 그 새끼는 상관 안 하더라고. 내가 창녀인가 싶을 정도였어. 나중엔 애널에 스와핑, 쓰리썸까지 요구하더라. 남들 하는 건 다 해 보자고. 내가 거절하니까 때리더라고. 거절당한 게 분해서 때리는 거야. 내가 얼마나 더 비참해야 저 사람이 멈출까 했어.저놈은, 내가 부끄러움도 못 느끼는 여자인 줄 알아. 저 인간한테 나는, 나는 저 변태 새끼의 더러운 욕정을 받아 주는 배설기관일 뿐이었어.”
희숙도 승연도 울고 있었다. 승연이 손수건을 건넸다. 하얀 바탕에 K.T.J 이니셜이 수놓여 있었다. 희숙은 그것이 태주를 그리워하는 승연의 마음인 줄 알았다. 희숙이 승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만 가지 사연이 중첩된 얼굴이었다. 서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껴안고 비통한 심정을 어루만졌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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