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불빛 아래 거리의 추위에 떨던 라라의 몸이 그가 오렌지 주스에 몰래 탄 보드카인지 진 때문에 갑자기 녹으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젊은 유부녀가 연하의 잘생긴 미혼남과 갖는 관계는 정신을 혼미하게 하기에 충분한 불륜의 독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 칸코보의 은밀한 정사는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죄의식과 죄책감과 함께 오기와 저항심이 뒤죽박죽되어 침대 위에 흐트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이 지환과의 첫 관계였다. 준호를 부정하고 지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거구의 준호가 가냘프고 작은 라라에게 행한 폭력들은 그녀로 하여금 준호에게 남편이라는 호칭 자체를 거부하게 했다. 어떤 계기가 되어야 자신이 이혼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을지, 여러 밤 그런 고뇌를 알코올로 잠재웠다. 그러던 그녀에게 지환의 장난기 어린 애정 공세, 그러면서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파상 공세는 라라를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그녀의 내적 방황을 외적 행동으로 이끌었다.
‘상관없어, 준호 너만 아니면 되는 거야. 너를 부정하는 것은 내 권리고 의무이며 자유야. 난 전준호의 여자가 아니야. 아내라니 터무니없어. 나는 그냥 나 자신일 뿐이야.’
라라가 첫 외도의 상대로 지환을 받아들인 것은 희망이 아니라 포기였고, 기대가 아니라 좌절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와의 정사는 자신을 버리기 위한 행동이었지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현재를 버리기 위한 절망의 몸짓, 그것이 지환과의 관계였다. 소심하고 이기적이고 희망 없는 청춘과의 외도. 그것은 준호의 아내, 라라에 대한 조소였다.
‘준호를 부정하고 모욕하는 데는 이지환 정도면 되는 거야. 너무 훌륭한 남자라면 오히려 미안할 일이지. 이것은 미래를 위한 행진곡이 아니라, 과거를 위한 진혼곡이니까.’
그것은 모스크바 광시곡의 시작이었다.
라라의 행동은 모든 기존 관계에 대해 파괴적이었다. 박기헌과의 관계도 점점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많은 이의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특히 기헌의 아내 진옥이 문제였다.
박기헌과 그의 아내 이진옥은 잉꼬부부였다. 기헌은 지적이고 박학다식한 영락없는 학자였고, 낭만적 신사였다. 진옥은 학구적이면서도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남편 뒷바라지하는 걸 보면 희생파였다.
물론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고, 그렇게 보인다고 모두 진실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적어도 라라와 준호 같은, 매의 발톱 같은 갈등을 감추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분명했다. 라라가 보기엔 참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특히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서 챙기는 기헌 같은 남자를 남편으로 가진 진옥이 부러웠다. 저런 남자와 함께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쩌면 저렇게 철저히도 다를 수가 있나, 준호를 볼 때마다 기헌의 모든 것이 정당하고 옳아 보였다. 비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은 존재 자체가 비교를 위해 창조된 것 같았다. 기헌의 크지 않은 체구까지도 존경스러웠다.
“기헌 선배 같은 오빠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박기헌은 그녀에게 진짜 ‘오빠’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헌은 마치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 구원 투수 같았다.
기헌과 진옥은 라라 부부와 각별히 지내고 있었다. 진옥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기헌 씨가 그러는데, 라라 씨보다 똑똑한 여자 지금까지 본 일 없대.”
그러면 기헌은 또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집사람 진옥이가 다른 여자를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거 처음 봤다. 라라는 정말 매력이 있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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