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당의 중도에 대한 환상과 집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새로운 보수’를 주문하면서 이념을 탈피하고 국민통합으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적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이념을 탈피하자는 한가한 소리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우리가 먼저 무기를 내려놓으면 국민통합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망상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상대방은 “죽창 되고, 망치 되어, 승리의 그날”을 외치고 있는 와중에 보수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길로 들어설 채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옛 중도주의자들은 중용의 정신에서 길을 찾았다지만, 지금은 그런 철학적 중도의 개념도 아닌 것 같다. 사회적 약자가 어쩌고 여성이 어쩌고 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 성장과 복지, 시장경제와 균형발전 등 형용 모순의 난제를 모두 안고 가자는 식의 논리로는 중도층이 아니라 국민 누구도 설득할 수가 없다.
정치란 모름지기 서사를 독점하는 것, 상징 자산이 분명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희미한 ‘전설’마저 내던지고, 엉뚱한 우물가에서 오염된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다.
중도층이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다. 즉, ‘중도층이 원하는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그들을 현상적으로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도층은 라캉이 언급한 정치적 대타자(Big Other)의 개념과 유사하다.
실체가 없는 허구의 대상을 좇아 정치적 지향점을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욕망의 삽질을 거듭하게 할 뿐이다. 먹고살기 바빠서, 그놈이 그놈이라서, 정치가 내 삶을 변화시켜 줄 것 같지 않아서 무당층이 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족시켜 줄 정책이나 정강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보수 정당은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갖다 바치며, 좌클릭 삼매경에 여념이 없다. 보수 정당이 무슨 짓을 하든 비(非)지지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좌클릭이 아닌 유산계급 타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급진정책을 표방한다 해도 이들의 반응은 냉담할 것이 분명하다.
최근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중도라고 대답한 사람들은 37.6%에 달한다. 대선 결과를 보면 이들의 약 66%가 진보로, 34%가 보수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지지 후보를 선택한 요인으로 ‘후보의 능력과 경력(43.8%)’을 우선적으로 보고 있다. 후보의 도덕성(18.3%)이나 이념 및 공약(10.1%)을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차기 정부가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국정과제는 일자리 창출, 물가안정, 경제성장이라 보고 있으며(42.5%), 차순위를 감안하면 이 비율은 63%까지 증가한다. 결론적으로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적임자로서 ‘힘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
반면에 보수 정당은 선거기간 내내 김문수 후보의 ‘파도 파도 미담’ 아니면 이재명 괴담, 형수 욕설을 재생하는 데 화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눈길을 끌 만한 공약은 실종되었고, 잘해야 주 4.5일제 같은 민주당 카피 버전, 철 지난 여성할당제가 전부였다. 12·3 계엄 사태와 탄핵 심판, 대선 후보 선출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난맥상은 중도층이 아닌 지지자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혁신’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인적 청산과 당헌 몇 줄 고친다고 해결될 일인가.
보수 정당이 착한 사마리아인 착시에 빠져 있는 동안 상대 당은 더욱 선명한 운동권 마인드로 무장하고, 해산된 옛 통진당 세력까지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 기세로 두 번의 총선에서 압승을, 그리고 대선 승리까지 거머쥔 것이다.
선거에 이기고 싶다면 유권자들을 향해 바라지도 않는 떡밥을 던지며 어깨 끈 드러내고 추파를 보낼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고 일관된 정당 정신, 선명한 정책 투쟁으로 국민에게 신뢰감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 국민의 의식이 정당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사회적 존재 가치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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