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거라(192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노인과 바다(1952) 등으로 널리 알려진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가장 유명한 소설가 중 한 명이다. 2009년 그가 1940년대 소련 정보기관인 KGB(국가보안위원회)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 소속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소련 KGB요원 바실리예프
2009년 4월 미국의 우드로 윌슨 국제센터(약칭 윌슨센터)가 ‘냉전시대의 국제사 프로젝트(CWIHP)’의 일환으로 출간한 온라인 보고서 ‘The Vassiliev Notebooks(바실리예프 노트)’에서 헤밍웨이의 스파이 행적이 공개되었다. 알렉산더 바실리예프(Alexander Vassiliev)는 1962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985년부터 2년간 KGB의 신입 요원 훈련소인 붉은기 연구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1987년부터 KGB에서 정규 요원으로 근무했다. KGB 제1국 소속으로 KGB 기록 보관소에서 근무하면서 미국 내 소련의 첩보활동을 분석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직전 퇴직했는데 1993년 KGB의 후신인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으로 소환되어 1930년대와 1940년대 미국에서 소련의 간첩 행위를 분석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SVR에서 제공된 각종 기밀 문서를 검토하였다. 바실리예프는 귀가 후 주요 파일의 내용을 자필로 요약해 기록하였다. 총 8개의 노트와 여러 장의 메모지에 분산 보관되었다.
1996년 바실리예프는 자신과 가족의 신변 보호를 위해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자신의 기록물과 기억을 되살려 소련의 미국 내 스파이 활동에 대해 정리했다. 그의 자료는 2009년 4월 윌슨 센터가 온라인으로 출간한 ‘바실리예프 노트’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2009년 5월 예일대학교 출판부는 바실리예프 및 공산주의 역사학자인 헤인즈와 하비 클레어가 공동 저술한 ‘스파이: 미국 KGB의 부흥과 몰락(Spies: The Rise and Fall of the KGB in America)’을 출간했다. 이 두 편의 저작물을 통해 대문호 헤밍웨이의 두 얼굴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이 간행물은 초기 냉전 역사의 중요한 측면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전직 해병대 대령으로 10년 넘게 CIA 요원으로 근무한 니콜라스 레이놀즈가 ‘작가, 선원, 군인, 스파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비밀 모험, 1935-1961’(2017년)이란 책자를 출간하여 헤밍웨이의 스파이 활동을 재조명하였다. 여기서 1930년대 헤밍웨이 반파시스트 활동,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열렬한 헌신, 소련 NKVD의 포섭, 중국 주은래와의 전시 동아시아 회동, 1950년대 후반 쿠바 반군과의 비밀공작 등 헤밍웨이가 몰두했던 과정을 조명했다. 특히 헤밍웨이가 소련의 스파이일 뿐만 아니라 미국 정보기관의 스파이로도 활동했음을 공개했다.
소련 스파이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 육군에 지원했지만 시력 때문에 탈락했다. 1918년 5월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 야전병원의 수송차 운전병으로 자원했다. 헤밍웨이는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되어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1919년 초 미국으로 돌아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주간지인 ‘토론토 스타 위클리’의 전속 작가, 시카고 월간지인 ‘코퍼레이티브 커먼웰스’의 부편집장으로 근무하며 집필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헤밍웨이는 파리로 이주하여 1926년 첫 소설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출판하였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1936~1939)에 특파원으로 참여했다. 이를 소재로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1952년에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고 난 이후 헤밍웨이는 아프리카의 사파리로 떠났다. 여행 중 두 차례의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는 쿠바에서 거주하였다. 1959년에는 미국 아이다호주 케첨에 거주하다, 1961년 여름 61세의 나이로 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는 대다수 작품을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 발표하였는데 소설 7편, 단편집 6편, 논픽션 작품 대다수는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여겨진다.
헤밍웨이의 스파이 활동을 살펴보자. 레이놀즈의 증언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1937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지 않았다. 미국 신문 연합의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던 중 반파시스트 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했고 프랑코의 민족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공화주의 게릴라에 합류하기도 했다.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헤밍웨이를 혁명적 좌파의 세계로 이끌었고 소련의 주목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1940년 12월경 소련 NKVD(KGB 전신) 뉴욕지부장인 제이콥 골로스에 의해 포섭되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 내에서 이념적 근거에 기반하여 공작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의 반파쇼 활동 등 혁명적 좌파 신념에 관심을 보였다. 헤밍웨이의 코드명은 ‘아르고(Argo)’였다.
헤밍웨이는 중국, 쿠바, 영국 등에서 소련 요원과 접선하며 다양한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소련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헤밍웨이 활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유용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헤밍웨이를 경멸했고 결국 KGB가 1948년 공식적으로 그를 정보 자산 목록에서 제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CIA의 계약 스파이 헤밍웨이
레이놀즈는 그의 저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비밀 모험, 1935-1961’ 책자에서는 헤밍웨이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전신인 OSS(전략정보국)와 FBI(연방수사국), 해군정보국(ONI)의 스파이로도 활동했다고 밝히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자 헤밍웨이는 미국 정보기관에도 개입하여 OSS의 여러 임무에 참여했다. 헤밍웨이는 쿠바 아바나에 방첩 기관을 설립해 줄 것을 제안하는가 하면 쿠바 해역에서 활동하는 독일 잠수함 유보트를 추적해 침몰시키겠다며 자신의 선박(필라르호)을 무장할 것을 요구했다. 초기에 미 정보기관은 헤밍웨이의 쿠바 공작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쿠바 주재 미국 대사인 브레이든은 그를 지지했다. 그는 헤밍웨이가 바텐더, 부두 밀매업자, 빈털터리 펠로타 선수, 전직 투우사, 바스크 성직자 등으로 구성한 기이한 조합을 동원하면 정보 수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크룩 팩토리(Crook Factory)로 알려진 그들은 1942년 미국 정보당국은 헤밍웨이의 기이한 계획에 동의하여 상당한 예산과 선박, 총기, 폭뢰 등을 제공했다. 그들은 쿠바 해안을 누비며 마치 독일 잠수함을 추적하는 듯했으나 독일 잠수함을 추적하지도 못했으며 관련 정보도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다. 그들은 기름만 축내며 낚시와 술, 도박 등을 하면서 항해했을 뿐이다. 미 정보기관들은 아무런 유용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헤밍웨이를 경멸하고 공작을 중단했다.
헤밍웨이의 스파이 활동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모험가로서의 위상을 보여주었고,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헤밍웨이의 숨겨진 두 얼굴이 첩보 역사가들의 노력으로 그가 죽은 지 48년 만에 알려졌다. 역설적으로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스파이 세계에서도 결국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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