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라는 호칭이 그만큼 어울렸던 배우도 드물다. 5일 세상을 떠난 배우 안성기 말이다. 영화를 좋아했던 젊은 시절, 많은 청춘들에게 안성기는 한국의 알랭 드롱이었다. 히트작 제조기였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는 빛이 났다. 170편의 영화를 촬영한 안성기는 그의 표현대로 ‘영화는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배우다. 명실공히 한국 영화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60 여년 연기 경력의 주인이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는 안성기였다. 영화 ‘고래사냥’의 거지에서부터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 ‘한반도’까지 그는 영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의 절제의 미학은 독보적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안성기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이 생겨났을 때 그걸 해낼 수 있는 배우”라고 했다.
당장 떠오르는 작품만 꼽더라도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칠수와 만수(1988)’ ‘투캅스(1993)’ ‘태백산맥(1994)’ 최초의 천만영화 ‘실미도(2003)’ ‘라디오 스타(2006)’ 등 한국 영화사의 주요 작품 속에는 배우 안성기가 있었다.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안성기는 여섯 살 때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1957)’에서 아역으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 70여 편에서 아역을 하다가 진로와 관련해 10년의 공백기를 가졌다. 그러다 영화 기획 일을 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계몽영화 ‘병사와 아가씨들(1977)’조연을 맡으며 다시 배우가 됐다. 그의 70년 가까운 영화 인생의 본격적 막을 열었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에서 중국음식점 배달부 덕배 역이 재출발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는 영화로 인생의 막을 내렸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17년 그의 데뷔 60주년 특별전을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전’으로 명명했다. 그의 필모그라피 자체가 한국영화사라는 평가나 다름없다.
그의 영화배우로서의 능력과 인간으로서의 매력은 정치적 진영의 편가르기마저 무력화시켰다. 김대중 정부 때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고사했고, 수차례 국회 비례의원직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현장에서 제가 얼마까지 갈 수 있는가에 인생을 걸고 있다”며 배우의 길을 고수했다.
한국 3대 영화 시상식인 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대종상영화제 모두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82년 제2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철인들’)을 출발점으로 2012년 제48회 백상예술대상 남자 최우수연기상(‘부러진 화살’)까지 30년에 걸쳐 최고의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20년 건강이상설이 대두됐지만, 2021년 5월 개봉한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복귀했다. 한국 영화사의 또다른 산 증인 ‘대한극장’에는 이 작품의 포스터가 수년간 붙어있었다. 국민배우에 대한 오마쥬였던 셈이다. 대한극장은 2025년 최종 폐관을 결정했다.
안성기는 2022년에도 알츠하이머 딸을 돌보는 아버지 역의 ‘카시오페아’, 한산 앞바다의 물길을 꿰고 있는 장수 어영담으로 출연한 ‘한산: 용의 출현’에 등장해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이른 바 혈액암을 진단받은 후 투약 투혼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자신의 영화는 ‘라디오 스타’였다. 그는 “자극적이지 않고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영화라서 좋다”고 했다.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영화라서 그랬던 걸까. 안성기는 2020년 투병 중에도 연기와 자선 활동을 이어왔으나 지난달 31일 자택에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영원한 무대 하늘로 돌아갔다.
정부는 이날 그에게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장례는 안성기 배우가 이사장으로 있던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가 주관해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회 명예위원장은 원로 배우 신영균, 위원장은 이갑성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배창호 감독 등이 맡았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 인기 스타가 하늘의 진짜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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