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희 칼럼니스트 ⓒ스카이데일리
忌三妄(기삼망); 僞-거짓, 怠-게으름, 違-어김을 하지 말고
盡三道(진삼도); 眞-참, 勤-부지럼, 協-어울림을 다하여
이렇게 僞-거짓말을 하지 말고 眞-참(正直정직)되게 怠-게으르지 말고 勤-부지런하게 違-어김(약속은 꼭 지켜야함)을 하지 말고 協-어울려라.
協- 서로 돕는 相扶相助(상부상조)를 하기 위해 하지 말 것과 해야 될 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다.
홍익인간사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우리가 그 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그 것의 노예가 되어 있는 종교들은 人間(인간)을 惑世誣民(혹세무민)하여 愚昧(우매)의 틀 속에 가두고 搾取(착취)하고 있는데, 현 人類(인류)는 얼간이가 되어 속고 갖다 바치고 존경을 한다.
◉ 먼저 기독교를 살펴보자.
기독교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인데 예수의 정신과는 전혀 상반된 종교다. 예수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유대교 구약의 토대위에 신약을 정립 해 놓은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다.
구약의 시작은 모세5경으로부터 인데, 모세5경은 함무라비 법전에서 나왔고 함무라비 법전은 슈멜 법전에서 나왔다는 게 학계에서 공인된 학설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모세가 애굽으로부터 유대민족을 이끌고 탈출 하는데서 시작이다. 오늘날의 바이블을 연구한 학자들이 모세는 실존했던 인물로 평가한다.
유일신 사상의 시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인데, 아브라함에게는 첫 부인 ‘사라’가 있었다. 사라는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브라함에게 권유하여 이집트 여인(하인) ‘하갈’을 첩으로 맞이하도록 한다.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에 하갈(첩)이 ‘이스마일’을 낳았는데, 즉 첩의 아들이지만 장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이도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아이를 낳지 못하던 첫 부인 사라가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게 된다.
이 유일신 사상의 불행과 다툼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구약에서는 신(여호와 야훼)에게 제물로 바쳐질 뻔 했던 주인공이 이삭이라 주장하고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제물로 바쳐질 뻔 했던 인물이 이스마일이라고 주장한다.
즉, 유대교의 조상 이삭과 이슬람의 조상 이스마일을 놓고 서로가 자기네가 정통이라고 싸우는 것이 처음 시작부터 지금 현재까지의 실상이다.
이 대목을 분석해보자. 아브라함이 86세에 하갈과의 사이에 이스마일을 낳고 100세에 사라와의 사이에 이삭을 낳았다는 것이다.
첫째; 아브라함이 86세와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생리학적으로 그대로 받아드려도 되는가 하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그 나이에 그 부인들 사라와 하갈도 그와 버금가게 나이를 먹었을 것이고,
둘째; 어째서 사라만을 아브라함의 부인으로 등장 시키지 않고 하갈이라는 이집트 여인(하인)을 첩으로 등장시키느냐 하는 점을 분석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이스라엘 유대민족은 애굽(이집트)의 노예에서부터 역사가 시작이 되니까 유대민족의 心情(심정)에서는 자신들도 한번 애굽을 다스려 보았으면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넷째; 차라리 하갈이 이스마일을 낳았으니까 사라는 이삭을 낳지 않은 것으로 정립을 했더라면 오늘날 유대교와 이슬람의 정통 다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인데, 그랬더라면 이스라엘 유대민족과 이집트 애굽 민족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 서로 화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니까.
다섯째; 그러나 사라가 이삭을 낳지 못한 것으로 정립을 해 놓으면 이스라엘 유대민족은 그 정통성이 반감될 것이므로 하갈이라는 하인을 첩으로 등장시켜 이스라엘의 유대민족이 이집트 애굽 민족을 다스려 보고, 또한 사라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100세의 늦은 나이에 무리하게 이삭을 낳게 함으로 애굽 민족과 유대민족의 영원한 반목과 투쟁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이것이 유대민족의 選民思想(선민사상)의 시작이다. 이 選民思想은 眞理(진리)가 아니며, 도대체 어떤 신이 우주만물을 자신이 창조 해 놓고 그 중에서 어느 특정 민족을 선택하여 그 민족만을 향해 내 ‘백성! 내 백성!’을 구구절절하게 외치느냐 말이다.
이 유대민족의 선민사상은 지구상에서 타 민족과 절대로 더불어 살아갈 수 없고 오로지 유대민족만 살아남고 여타 다른 민족을 지구상에서 쓸어 내 버리고자 하는 사상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선민사상이 태어 낳는가. 유대 민족은 애굽의 노예로서 압박과 설움에서 분노와 증오심으로 복수를 해 보자고 유대민족을 하나로 담합시키기 위하여 선동하는 것이 바로 選民思想(선민사상)이다.
그래서 구약의 여호와 야훼는 질투, 분노, 증오, 복수, 징벌 등으로 일관되게 복수심이 이글거리고 있지 않는가?
자- 예수라는 위대한 인간이 세상에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유대교의 선민사상, 이것을 이대로 놔 둬가지고는 이스라엘 민족뿐만이 아니고 세계의 전 인류가 평화스럽게 살 수 없다는 것을 12~13세에 깨닫고 그 이스라엘 내에서는 그 것을 깨트릴 가르침을 찾지 못하니까 어린 나이에 상인들을 따라 인도에로 구도의 길을 갔었는데, 신약에서는 이 예수의 구도의 과정을 빼버리고 16여 년의 공백 기간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가 인도로 구도의 길을 떠날 때의 나이를 예의 주시 해 보자. 지금의 우리 어린이들은 그 나이에는 응석부리로 사춘기 시절을 격을 나이다.
철부지로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고 부모로부터 무엇을 해 달라고 뗑강이나 부릴 나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나이에 벌써 人類愛(인류애)로서 어떻게 하면 인류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 한 것이다. 그래서 인류평화를 이룰 수 있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인도로 구도의 길을 간 것이다.
예수는 다시 그의 조국인 이스라엘로 돌아와 구약에 의한 이스라엘의 選民思想(선민사상) 이것을 타파하고 개혁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독교를 사랑하고 기독교를 추종하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이스라엘에서의 선교 기간 동안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 저항하는 것을 구구절절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던지 아니면 <성혈과 성배>에서 밝힌 것처럼 프랑스로 망명을 했던지 간에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에 70여년 후에 태어난 사도 바울은 처음에 유대교의 착실한 신도였다.
예수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기록들은 바울의 글들이다. 그는 엄격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나 그의 아버지가 비싼 대가를 치른 덕분에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인 본명인 사울을 바울 Paulus로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상류층에 속했으며 엄격한 바리새인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여러 방면에 걸쳐서 심오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어를 익히고 그리스의 시와 철학에 관한 방대한 서적을 읽었다. 그는 18세에서 20세 사이(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가마리엘 Gamaliel 1세의 제자가 되어 신학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그때 유대교 광신자로 소심하고 율법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했으며,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직업에 장애가 되는 초기 기독교도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예루살렘의 경계 밖에서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처형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을 내려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는 그 일을 수행하는데 쏟아 붓는 유별난 정열을 제사장을 감동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다마스커스 근처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매력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위치가 주는 가능성을 깨닫고 그것에 압도되었다.
그는 미래의 거대한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됐다.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를 언급할 때에 그것은 대체로 바울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계율과 교훈의 교리이므로 <바울주의Paulinism>라고 지칭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교회의 역사가 빌헬름 네스틀레 Wilhelm Nwstle는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설명한다.
“기독교는 바울이 만든 종교다.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을 예수에 관한 복음으로 대치해 놓았다”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에서 옮김>
기독교 초기에 영지주의파와 문자주의파가 있었는데,
◆ 영지주의 파; 예수의 영성과 정신을 그대로 따르는 계파
◆ 문자주의 파; 신약에 기록된 문자들을 절대가치로 신봉하는 파
이 두 파의 싸움에서 영지우의파가 져서 영지주의 파는 사라지게 되었는데, 영지주의 파의 선구자 마르시온은 구약 전체를 페기처분하고 신약의 계시록 모두를 페기했고, 마르시온 신약을 따로 정립했다. 5세기경 까지 이들 교파가 존속됐었다. 문자주의 파는 영지주의 파가 사라진 뒤 마르시온을 인류 최초로 온 사탄이었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 같이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문자주의 파 들의 정략에 의해서 정립된 것이다.
예수보다 600여년 후에 태어난 무함마드는 그 당시 기독교가 번창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서 그에 대응하는 아랍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이슬람을 탄생 시키는데, 그도 또한 앞의 설명처럼 구약을 토대로 코란을 정립하면서 구약 자체를 비판하고 신약의 모순점을 비판하는,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지도 않았으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허위라는 것을 코란에 명기 해 놓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가 부활했다는 부활절을 범 세계 적으로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이 같이 기독교는 거짓말로 일관한다. 천국과 지옥, 예수 재림 등 이것들은 모두가 惑世誣民(혹세무민)의 거짓말이다.
예수는 구약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구약에 여호와 야훼가 질투, 분노, 증오, 복수, 징벌의 신을 신약에서는 사랑, 용서, 구원, 복음으로 바꿔 놓은 것만을 보아도 단박에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마르시온은 “모세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은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 예수의 하나님은 따로 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은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구약의 야훼와 신약의 야훼를 동일한 신으로 믿고 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모순된 논리는 없다. 다음 칼럼에서 불교를 비판할 것인데 불교도 이와 大同小異(대동소이)하다.
예수는 바이블 구약을 타파하기 위하여 등장한 聖人(성인)인데 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은 구약을 계승하고 예수를 타파한 것이다. 이러면서도 예수를 찬양한다고 외쳐 댄다. 그러고는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이라고 한다. 기독교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 후로 땅에는 평화가 이룩된 역사가 있는가?
지구촌 인류를 피로 물들였고 지금 현재도 이스라엘은 이란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려야겠다고 하며 이란은 이스라엘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려야겠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이교도의 풍자가 켈수스는 바이블의 천지 창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을 이렇게 꼬집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인간을 위해 만든 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한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노릇이지만, 그 세계가 창조된 방식은 더욱 어리석다. 그들은 창조의 날들을 할당한다. 하늘이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땅이 정해지지도 않았으며, 하늘에는 태양도 달도 별도 없는데, 어떻게 날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더없이 위대한 하느님이 벽돌공처럼 오늘은 이런 일을 하고, 내일은 저런 일을 하겠다. 셋째 날에는 또 이런 일, 넷째 날에는 저런 일, 다섯째 여섯째 날에는 또 어떤 일을 한다는 둥, 자기 일을 그렇게 나누어 처리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없지 아니한가. 그런 하나님이라면 보통의 일꾼처럼 지쳐서 여섯째 날 후 쉬는 날이 필요하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을 것이다. 휴식이 필요한 하느님, 두 손으로 일하는 하느님, 막노동 십장처럼 지시를 내리는 하느님의 행동은 도무지 하느님답지가 않다고 꼬집을 거리도 못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없는데 첫째 날이 있고, 해도 달도 없는데 낮과 밤을 명명하고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을 운운한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수긍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농부처럼 여러 나무를 심었다고?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우매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지음〔승영조 옮김〕《예수는 신화다》에서 보면
바이블 신약은 신화를 합성하여 구성하고 역사적 사실로 가르치고 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 ‘야고보서’, ‘요한서’, ‘유다서’, ‘요한계시록’들은 예수의 역사성에 전혀 관심이 없고, 여기에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들은 원래 그런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저자가 없었다.
각 복음서는 각 그리스도교 분파의 ‘가르침’으로 간주됐다. 그러다 후세에 가상의 저자 이름을 얻게 됐다. 복음서들은 사실상 익명의 작품이다. 복음서는 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내용이 바뀌었고 덧붙여졌다.
이처럼 수많은 편집과 수정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이 모순되거나 일관성을 잃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는 성자가 아닌 사람이 혼자서 신약을 읽는 것을 금지 했다.
이 책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거짓말’이라고 말 하고 있다.
<의심의 역사> p413~414
폼포나치는 만약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세 가지 종교만 있다고 본다면 세 종교 모두 거짓이고 온 세상이 속고 있는 것이거나 최소한 두 종교는 틀렸으며 인류의 대부분이 속고 있는듯하다고 쓰고 있다.
이어서 p419~420에 이렇게 나와 있다. 칼뱅은 루터의 논리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루터는 우리가 너무나 큰 죄인이기에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믿음과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최소한 개인의 행위나 노력에 대한 여지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전지전능한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누가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알고 있으며 따라서 태어나자마자 누가 구원 받을지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믿음에 대한 노력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한 노력으로 변했다. 이렇듯 극단적이고 불안한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서로 비난하기에 바빴다.
여기에 필자가 책에서 쓴 ‘메아리 없는 외침’이라고 쓴 글을 옮겨본다.
바티칸의 직전 교황(265대) 베네딕토 16세는 이슬람성지, 유대교성지, 통곡의 벽 등을 찾아가 참배를 드리고 이슬람과 유대교를 향해 ‘세계평화를 위하여 우리가 화해하자’고 외쳤다.
일반 세계의 사람들 중에는 베네딕토의 행보를 보고 기독교에서는 “저렇게 화해의 손짓을 보내는데 이슬람과 유대교에서는 응답이 없구나”하고 아쉬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해를 하려면 화해를 할 이론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말하자면 자동차가 세 대가 있는데 한 대는 경유(기독교)로 가는 차, 한 대는 휘발유(유대교)로 가는 차, 한 대는 가스(이슬람)로 가는 차 이렇게 세대가 있는데 경유로 가는 차가 나서서 우리 그럴게 아니라
① 경유, 휘발유, 가스를 혼합해서 같이 쓰자. 아니면
② 너희들도 경유로 써라. 또는
③ 나도 같이 휘발유나 가스로 쓰겠다.
베네딕토의 제안이 이렇게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화해를 할 수 있는 제4의 대안이 있는가? 아무런 대안도 없이 정략적인 공염불만 하고 다녔던 베네딕토는 위선자다.
밀가루 반죽 세 덩어리를 한 그릇에 담고 주무르면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고슴도치 세 마리를 한 바구니에 담고 휘둘러보아야 한 마리가 안 된다. 서로 상처만 날 뿐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이 한 조상 세 가족 종교는 예수를 놓고 유대교에서는 ‘사기꾼’이라고 규정을 하고 이슬람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예수가 아닌 대체인물이라고 경전에 나와 있다.
기독교는 예수가 십자가 처형 후 3일 만에 부활을 했다고 해마다 부활절을 범세계적으로 행사하고 있는데 이슬람에서 보면 “죽지도 않았는데 부활은 무슨 부활” 할 것이 아닌가?
이 같이 한 조상 세 가족 종교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논리를 가지고 태어난 생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차라리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상호 편 할 것이다. 만나면 싸우니까 말이다.
이 집단들은 세계평화를 외칠 자격이 없다. 자신들이 퇴장을 해 줘야 세계평화가 이루어진다.
※ 기독교 영지주의 파에서는 윤회설을 수용했다. 만약에 문자주의 파가 사라지고 영지주의 파의 기독교가 오늘에 이어졌다면 기독교 사상이 인도의 사상과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자주의 파는 구약의 토대위에 예수의 껍데기만을 앉혀놓고 예수의 정신은 모두 버렸다.
영지주의 파가 성공을 했더라면 아마 유대교를 퇴출시키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이슬람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되었으면 지구촌 인류는 보다 더 평화스러웠을 것이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피로 물들이는 이 현상은 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오늘날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필자의 지론에 귀를 기울여야 되고 또한 論駁(논박)을 해 주기를 바란다.
기독교의 신약에서 예수의 인도에서의 구도의 생활과 예수를 낳게 해준 아버지를 빼 버림으로서 신약은 출발부터 거짓으로 시작이다. 구약도 마찬가지다. 이러하니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믿으라고 강조한다.
1+1=2다 2+2=4다. 이러면 굳이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다. 안 믿어도 정답이니까. 세상에 정답을 보고 믿으라고 피곤하게 강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1+1=3이다. 이렇게 되면 어째서 3이 되는지 설명을 해야 되고 또한 그것을 믿으라고 강조해야 된다. (다음 칼럼은 불교에 대해 내용이 이어집니다)
<본 칼럼의 필자의 의견이며 스카이데일리 편집방향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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