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정호승, ‘새벽편지’ 中)
사실, 우주는 어디에나 있다. 지구 밖만 우주인 것은 아니다. 우주는 호흡하는 입술과 어두운 마음에도 있다. 그런 입술과 내면을 지닌 인격체는 소우주에 값한다. 본디 만물에는 별의 파편이 첨부돼 있지 않은가. 파편은 그 자체가 한 우주로서 무한한 우주들을 내포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은 그래서 새 생명을 품은 우주이리라.
픽사가 생산하는 영화들이 점점 다양한 차원의 영역들을 다루고 있는 상황도 마치 우주의 팽창 같다. 로봇들이 녹색 식물을 지구로 전하기 위해 우주를 모험하는 ‘WALL·E(2008)’를 시작 삼아, 의인화된 감정들이 사춘기 소녀의 요동치는 마음속 세계를 어떻게 변이시키는지 흥미롭게 보여준 ‘인사이드 아웃(2015)’을 거쳐, ‘코코(2017)’는 현세와 명계의 관계를 골자 삼아 생자와 사자의 소통을 감동적으로 극화했다. ‘루카(2021)’는 심해와 육지를 넘나드는 바다 괴물들의 깜찍한 활약을 다루지 않았던가.
이렇게 픽사의 영화적 우주가 종횡무진 확장하는 흐름은 ‘엘리오(2025)’에 도달해 또 다른 발산과 수렴을 맞은 듯하다. ‘엘리오’는 엉뚱한 소년 엘리오가 외계 생명체 글로든과의 우주 모험을 통해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 영화는 내면에 자리한 상통(傷痛)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이 공감과 위안의 상통(相通)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유연한 이미지 디자인과 관련짓는 영화로 관측된다.
영화의 오프닝 씬부터 의미가 사뭇 깊다. 지구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여준 뒤에 탁자 밑에 웅크린 엘리오를 화면에 잡는 오프닝 씬은 엘리오가 지구가 포함된 전 우주를 축약한 대표 캐릭터임을 말해준다. 그런 그가 테이블 밑에 숨어있음은 그의 마음속에 의기소침한 어둠이 존재함을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으로 포착된다. 그는 조실부모한 고아다. 외로움의 음울한 그림자가 있고도 남는다.
엘리오가 별난 복장을 걸치고 외계인을 향해 자신을 우주로 데려가 달라는 신호를 전송하는 괴짜로 등장함은 많은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괴짜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묘한 이를 표현하는 어휘다. 우주는 그 심연을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그런 점에서 타인도 일종의 우주다. 엘리오가 외계인과 소통하고자 해변 모래사장에 미스터리 서클을 그리거나 자기 방을 우주적으로 디자인하는 등의 희한한 행동을 선보이는 것은 그만큼 그 아이의 내면에 움튼 외로움과 인정 욕구가 강하게 표출된 증상으로 여겨진다.
엘리오가 외계인 가면을 쓴 아이들의 추격과 괴롭힘을 당하던 어느 밤, 그렇게도 열망하던 푸딩 모양 우주선이 어둠을 밝히고 시간을 멈추면서 그를 우주로 데려간다. 수많은 지구 어린이 중에서 왜 엘리오가 간선됐는지, 그 이유와 배경이 밝혀지지는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엘리오가 만인의 실존적 외로움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기억하는 수준에서 그치고자 한다.
모든 이가 외로움을 느낄 수는 있어도 광대한 우주 속에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주제도 다소 평범한 상수에 그치기는 한다. 엘리오가 우주로 진입해 목격하는 별세계는 그런 상수에 영롱한 광채를 불어넣는 변수들로 작용하기에 족하다. 이 영화의 우주 디자인은 대체로 유연한 이미지 스타일링으로 집중된다. 우주의 고등 지적 생명체들이 교섭하는 커뮤니버스는 거대한 해파리 형체를 띤 데다가, 그 세계를 이루는 구성원들 대다수의 개성적 외양도 찰랑거리는 일렁임을 보여준다. 액상형 슈퍼컴퓨터 우우우의 존재와 디자인도 여러모로 기발하다. 우우우 또한 액체 상태라는 점에서 유동성을 지니거니와, 현 기술 수준의 고체 컴퓨터가 띤 딱딱한 물성을 뒤집은 역발상의 매력적 산물이라 평할 만하다. 물렁거리는 느낌의 이미지가 많이 빚어진 것은 연체동물형 캐릭터 글로든의 외형적 개성을 자연스레 중화하려는 의도에 덧붙여 상대의 성향과 맥락에 따라 소통의 주파수를 조절하는 열린 마음의 주제 의식을 이미지 디자인에 녹여낸 결과로 판단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도전적 요소는 글로든의 독특한 외양에 집중된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로서는 예외에 속한다고 분류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글로든의 외모가 예쁘거나 깜찍한 편보다는 차라리 징그러운 쪽에 가깝다고 보는 것에 이견은 없을 듯하다. 영화도 그 점을 스스로 잘 인지했던 것 같다. 글로든 역 여성 성우로 레미 에저리를 기용해 앙증맞은 목소리를 글로든에게 부여함으로써, 캐릭터의 귀여움을 한층 살려냈다. 엘리오와 글로든이 함께 놀면서 차차 친해지는 과정을 경쾌한 배경음악의 여러 연속된 쇼트들로 보여주는 연출도 정성스럽다. 이 시퀀스는 인간과 비인간적 생명체 간의 애정과 우정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공들인 노력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글로든이 연체동물 캐릭터로 설정된 덕분에 엘리오가 용암로에서 목숨을 건지거나 종래의 모범적 캐릭터로는 구현하기 힘들 장면들이 가능했던 장점까지 발견된다.
그러함에도 이 영화에서 글로든의 외면이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내면에만 간직했던 상흔을 꺼내 보이는 그 고백이 진실한 교감으로 연동되는 원리에 놓인다. 엘리오에게는 자신이 틀려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소외감이, 글로든에게는 자신이 약해서 아버지에게서 사랑받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본모습을 외부와 차단해 왔던 어두운 안대와 갑옷을 스스로 벗어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드러내는 일은 심대한 우주로 나아가는 일만큼 가슴 떨리는 작업이리라.
그러나 찬연한 신생으로 나아가려면, 아픔을 고백하는 아픔은 면할 수 없는 법. 그렇게 두 우주는 각자의 아픔을 통해 만난다. 이렇게 ‘엘리오’는 외로움을 느끼는 뭇 우주들이 傷痛으로 우주들 전체와 열렬히 相通하고 있었음을 부드럽게 일깨워준다.
영화 ‘엘리오(2025)’ 줄거리
엘리오는 부모를 여의고 고모 올가와 함께 사는 엉뚱 소년이다. 괴짜처럼 보이나 내심 외로움을 느끼던 그는 지구 대표로서 우주의 커뮤니버스로 초대되고, 외계 생명체 글로든과 모험함으로써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도미 시 감독 소개
공동 감독으로 참여한 도미 시는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2022)’에서 레서판다로 변하는 주인공 13세 소녀 메이린 리의 변덕스러운 감정도 다룬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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