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시속 4㎞로 걷는다. 마차가 달리는 속도는 약 17㎞였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865년 증기기관 자동차는 시속 30㎞보다 빨리 달렸다. 그러나 런던에선 시속 3.2㎞ 이하로 엉금엉금 다녔다. 말과 마차를 보호하기 위해 붉은 깃발법(赤旗條例)이 만들어지자 승객을 뺏기던 마차 업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동차는 사람과 마차보다 빨리 주행할 수 없었고, 자동차를 운행하려면 55m 앞에서 붉은 깃발(낮)과 붉은 등(밤)을 흔들어야만 했다.
느린 자동차는 쓸모가 없었다. 사람보다 느린 28인승 증기기관 버스는 외면을 받았다. 마차 업계와 철도 업계 로비는 성공했다. 유권자를 의식했던 영국 의회는 사양 산업과 마부 일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자동차보다 기수에 신경을 썼던 영국은 자동차 산업 주도권을 독일과 미국에 뺏겼다. 붉은 깃발법이 없었다면 자동차 왕 헨리 포드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붉은 깃발법은 신산업 발전과 경쟁력이 정치인의 선택에 좌우된다는 교훈을 알려준다.
한국은 영국과 다를까? 영국이 자동차를 규제한 지 147년이 지난 2012년 한국은 대형마트 영업을 제한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은 2012년 3월 유통산업발전법을 개정했다. 경제민주화와 골목상권 보호가 명분이었다. 대형마트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 휴업을 강제했다. 사실상 전통시장과 소상공인을 겨냥한 선거운동이었다. 물가상승을 억제하고 장바구니 부담을 낮추기 위해서 장려됐던 대형마트는 선거를 앞두고 골목상권과 소상공인을 몰락시킨 원흉으로 몰렸다.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대형마트는 2010년대 온라인 전환기에 날개가 꺾였다. 저마다 온라인몰과 배송 체계를 갖췄으나 영업시간 제한은 온라인 배송에도 적용됐다.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를 인수했던 2015년 소셜 커머스(공동구매) 기업 쿠팡은 외국 자본을 등에 업고 쿠팡맨을 고용해서 로켓배송 시대를 열었다. 세계적인 유통기업 월마트(미국), 까르푸(프랑스)와 경쟁에서 이겼던 이마트와 롯데마트, 홈플러스도 규제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온라인 유통산업의 주도권을 쿠팡에 뺏길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 태도는 코미디에 가까웠다. 낡은 규제로 홈플러스를 폐업 직전으로 몰았던 정치권은 개인정보 유출사태로 궁지에 몰린 쿠팡에 홈플러스를 인수하라고 주장했다. 영국 의회가 독일 벤츠에 파산 위기에 몰린 영국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연 매출 49조원을 돌파한 쿠팡은 정치권 바람과 달리 미국에 로비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오늘날 영국엔 마차도 마부도 없다. 마차를 지키려던 영국이 자동차 산업 경쟁력을 잃었을 뿐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구멍가게를 지키려던 규제는 쿠팡이란 유통공룡을 낳았다. 월마트와 까르푸와 경쟁해서도 이겼던 홈플러스와 롯데마트는 적자 신세다. 혁신을 가로막은 대가는 기술 퇴보와 산업 몰락이란 청구서로 돌아온다. 선거마다 정치권이 흔드는 깃발은 없는가? 청구서는 이미 발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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