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자데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매일 밤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아라비안 나이트 -
1992년 모스크바.
라라의 클래스 메이트인 김후원과 최준민의 친구 중 이지환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들 세 남자는 같은 기숙사에 살면서 친해졌고, 특히 동갑인 지환과 준민은 단짝처럼 늘 붙어다녔다. 지환의 별명은 ‘눈이 예쁜 남자’였다. 그 촉촉한 눈매가 젊은 여심을 매료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렸다. 바람둥이라는 말도 따라다녔다. 그들은 그것을 레종 도뇌르 훈장처럼 여기는 눈치였다.
“저 라라 씨 좋아해요. 그래도 되죠?”
모스크바 한국 유학생들이 회식하던 날, 오작교 식당에서의 일이었다. 지환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순간 남자들은 와하하하 하면서 웃음과 야유를 터뜨렸고, 여자애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인 채, 안 보는 척 눈만 옆으로 움직여 응시하고 있었다. 일부는 매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흥미롭다는 듯, 그 뚱딴지같은 상황을 지켜보았다.
전준호는 당혹감과 무기력감이 혼재된 멀뚱해진 눈으로 라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만 껌벅일 뿐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다.
“야, 임마. 여기 이 형이 형수님 남편이야. 인사나 드려.”
준민이 지환의 어깨를 탁 치며 다그치는 척했다. 지환은 준민에게 핀잔을 주었다.
“알고 있어. 그게 뭐 어때서. 나 형이라고 부르기 싫고, 라라 씨를 형수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야.”
“어어, 하하하하.”
좌중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준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여전히 음식을 먹던 고개를 들어 멍한 표정으로 지환과 라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주변에 마치 도움이라도 청하는 눈빛으로 사방을 소심하게 둘러보았다. 누군가 지환을 질책하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웃음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만 커졌을 뿐, 준호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최준민이 짐짓 이지환의 옆구리를 다시 쿡 찌르는 척했다.
“저 형한테 사과해.”
“싫다니까.”
지환의 거절이 생뚱맞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술에 취해 이야기에 열중하는 저쪽 끝 몇 명만 제외하고, 대다수 학생의 눈이 라라와 지환과 준호 쪽으로 쏠려있었다.
지환의 그런 행동에 대해 준호는 여전히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아, 그런 황당한 일을 당해도 화 한번 안 내고 넘어가시네예. 성품이 부처님 반토막이라예. 라라 씨는 좋겠어요, 그런 사람하고 사니까. 인물 좋지, 성격 좋고……”
그건 그들이 집에 돌아와서의 상황을 한참 모르는 이야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부터 라라를 들들 볶는 준호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꼼짝 못 하더니 집에 오자 그녀 앞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놈을 언제 만났어? 밖에서 얼마나 꼬리를 치길래 젊은 사내새끼들이 저렇게 나오는 거야? 말해, 무슨 사이야?”
“그런 얘길 왜 그때 그 남자애 앞에서는 못하고, 꼭 내 앞에서만 이 야단법석이야. 정말 피곤하다. 거기서 그에게 따끔하게 얘길하든가 혼을 내줘야 안 그러지, 자기를 만만하게 보니까 앞에서조차 대놓고 그러는 거 아냐.”
라라가 되받아쳤다.
“그게 여자 처신 문제지, 어떻게 내 문제야. 다 니 탓이지. 대체 밖에서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길래 나이 어린 사내새끼들까지 저래?”
“따로 본 일조차 없는 남자애가 저렇게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나.”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