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늘 어떤 풍부한 질감을 내뿜는다. 그 풍부함을 감촉하고 있으면, 감성과 지성이 함께 고양되는 바가 있다. 그가 연출한 뭇 영화에서 집중된 관통력으로 힘차게 확장해 가는 주제 의식은 꽃처럼 피어나는 피처럼 강렬하다.
그가 가족들의 엇나가는 애증을 유려한 편집 리듬과 음악 연출로 엮은 ‘매그놀리아(1999)’는 걸작에 가깝게 만개한 영화로 기억된다. 그가 감독한 다른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는 인간의 탐욕과 집착이 파국의 광기로 치닫는 절정을 극한으로 터뜨린 파괴적 걸작이다. ‘마스터(2012)’는 방황하는 알코올 중독자 프레디가 심리 연구자 랭케스터와 관계 맺으면서 자기 불안을 달래려는 맹신과 의심의 과정을 두루뭉술한 분위기로 아찔하게 다루는 긴장감이 탁월한 영화였다.
이렇게 그의 필모그래피를 간략히 살펴보면, 그의 영화는 부조화하기 쉬운 것들을 오묘하게 조화시키는 데에 능함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부조화는 썩 달갑지 않은 불청객일 때가 많다. 빠른 속도와 높은 효율을 우선하는 현실에서 분석과 이해를 명쾌하게 이루어지도록 돕기는커녕, 더욱 복잡하게 하는 부조화의 속성은 우중충한 회색처럼 우울감을 돋우기에 안성맞춤이다. 명확한 판단과 결정을 위해 흑백논리의 이분법이 애용되는 일상에는 나름 절박한 일리가 있었던 셈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 이하 ‘배틀’. 이 글에서 괄호 안의 영어 어휘는 모두 이 영화의 대사로부터 인용됐음)’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새 명작으로 빛난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경직된 이항대립을 깨부수는 통렬한 힘에 있다. ‘배틀’은 무장 혁명 단체 프렌치75의 일원이던 밥 퍼거슨이 숙적 스티븐 록조에게 납치된 딸 윌라를 구출하는 액션 영화답게 장쾌한 액션과 시원한 스펙터클을 자랑한다. 하지만 영화의 통쾌함이 액션 볼거리에만 있지는 않다. ‘배틀’은 극적 상황, 대사, 미장센을 통해 흑백논리를 분쇄하는 영화로서 온갖 이원 대립에 균열을 가하는 영화적 실천에 값한다.
‘배틀’은 영화 밖 현실을 상당히 유사하게 반영한다. 그 점에서 ‘배틀’의 오프닝 씬은 중요하다. 오프닝에서 프렌치75의 흑인 여성 단원인 퍼피디아 베벌리힐스가 걸어오는 정면이 보이고, 그녀가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에 있는 이민자 수용소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곧바로 이어진다. 흑인과 여성이 각각 백인 우월주의 단체(KKK)의 극단적 인종차별과 가부장제의 성차별이 전제한 극단적 이분법에 시달리는 피해자임을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 이민자 집단도 다종다양한 경계들을 넘나드는 문제들이 응축된 모호성이 짙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외교적 문제를 고려할 때,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흑백논리에 관한 자기 정체성을 압축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프렌치75는 이민자 수용소를 공격함으로써, 계류 이민자들을 해방하는 정치적 조직임을 표방한다. 그 습격에서 퍼피디아는 백인 남성 록조를 총으로 위협해 제압하는데, 이 부분도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 간의 통상적 위계를 뒤집는 상징성을 띤다고 여겨진다.
더욱 놀라운 전개는 그 다음이다. 퍼피디아는 록조와 관계해 윌라를 임신하고 낳는 데다가, 윌라를 백인 남성 밥에게 맡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흑인과 백인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관행이 잔존하는 현실을 떠올릴 때, 백인 계부가 혼혈아 양녀를 찾기 위해 고투한다는 내러티브 자체가 퍽 새롭고 놀랍게 다가온다. 16살의 윌라가 흰 도복을 입고 익히는 무예가 동아시아 무술임도 눈에 띈다.
윌라가 말하듯, 프렌치75의 꿈과 달리, 세상은 16년이 지나도 혁명은커녕 조금도 안 변한 상태다. 정력적 혁명가로 활동했던 밥만 무력하게 변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런 밥이 집에서 보는 영화가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알제리 전투(1966)’임은 의미심장하다.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저항했던 처절한 투쟁과 알제리인들에게 가해졌던 잔혹한 고문을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혼합 양식으로 구현한 이 흑백영화는 밥의 지리멸렬한 현실을 강조하면서도 이항대립을 허물어뜨리는 ‘배틀’의 관심을 암시한다.
밥이 윌라를 구하는 과정도 험난하다. 그가 프렌치75 단원에게 연락할 때마다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해 애먹기 때문이다. 밥 역의 레오너드 디카프리오는 그 답답한 심정을 풍부한 표정 연기로 표현했다. 그는 외모의 수려함과 연기의 출중함이 반비례할 것이라는 흔한 선입견이 잘못됐음을 배우로서 능란히 증명한다. 밥이 끝내 안 떠오르는 암구호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는 상황에서 잿빛 매 10(gray hawk 10) 작전을 발동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특기될 만하다. 회색은 흑색과 백색이 섞인 어중간한 색이지 않은가.
윌라는 화장실에 들어온 프렌치75 단원에게 암구호를 제대로 답한다. 그녀가 자기 뿌리에 가까울 프렌치75에 속한 단원을 처음 만나는 이 장면의 미장센은 간과되기 어렵다. 윌라는 흰 윗옷에 검은 외투를 걸치고 있다. 화장실에도 흰 세면대와 검은 디퓨져가 있다.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2002)’에서 알록달록한 색채를 선명히 활용했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기에 흑백색이 구현된 이 미장센도 영화의 문제의식을 머금었다고 해석되기에 손색없다. 또한, 흰 화장실 벽면에 빨간 타일들도 몇몇 있는데, 이 타일들은 영화 후반에서 윌라의 총을 맞고 머리가 죄다 새빨개진 록조의 모습을 예비하는 것만 같다.
‘배틀’은 부녀가 악당 때문에 분리(disconnect)가 됐으나 끝내 재회하는 액션 영화의 큰 흐름 속에서 흑백논리의 완고한 틀을 조목조목 분쇄하는 디테일이 뛰어난 영화다. 연결될 수 없었을 영역들을 가두었던 이원적 틀을 변화시키기(change), 그 실천이 바로 혁명(revolution)일 것이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줄거리 요약
혁명을 꿈꾸는 무장 단체 프렌치75에서 활동했던 밥 퍼거슨은 자기 숙적 스티븐 록조에게 납치된 딸 윌라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치른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장면을 부드럽게 편집하면서도 강렬한 극적 긴장을 만드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남우조연상·각색상·편집상·캐스팅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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