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기억이 반딧불처럼 번쩍 나타날 때가 있다. 기억의 이 옅은 섬광이 과거와 현재를 연이음으로써 미래의 창조를 돕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미래의 창조는 과거 데이터의 단순 투영과는 다르다. 예측이 불가한 위험을 무릅쓰고 완전히 다른 영역을 향해 도약하는 생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를 열기 때문이다. 이 도약은 인생과 윤리의 창조적 공진화를 지속시키려는 사랑에도 내밀히 침투한 운동이리라.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상호 침투하는 군무가 독무로 화하는 이 유기적 운동은 시적 흐름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김용환 감독의 ‘연의 편지(2025)’가 청명한 시적 영화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 안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의 기억에 스며 있다. 그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로는 처음 연출한 이 영화는 반딧불에 연결된 감동적 반전을 일으킨다. 영화에서 열여섯 중학생 소녀 이소리는 그녀에게서 희망을 얻었었던 정호연이 남기고 떠난 편지 열 개를 또래 소년 박동순과 찾아가면서 자신의 호의적 도움이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선한 용기와 힘을 주었음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반딧불의 연시(聯詩)로 기억될 만큼, 반딧불의 기억과 연(緣)을 맺은 세 중학생의 아련한 비밀과 편지 찾기 이야기를 청아한 이미지로 이어 나간다. 소리는 어릴 적 같은 병원에서 지냈었던 호연에게 “반딧불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게 해준다(김용환 감독, 정은경 각본, 조현아 원작, ‘연의 편지 애니메이션 아카이브북’, 오팬하우스, 2025, 62쪽. 이하 이 글에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됐음)”는 말을 들려주었었다. 호연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 비행 청소년 학생 안승규와 심하게 몸싸움을 벌인 후 산에 홀로 숨어 있던 동순과 처음 만났을 때 동순에게 같은 말을 들려준다. 꼬마 호연이 그 말을 들었었고 청소년 호연이 그 말을 들려주었던 두 시공간 모두 다 은은한 반딧불들로 충만한 감성적 배경을 이룬다. 그만큼 영화의 이미지는 맑고 섬세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매우 유려한 그림체와 높은 화질을 자랑한다.
고해상도의 부드러운 이미지는 영화의 ‘판타지적 미장센(301쪽)’를 형성하는 데에도 건실히 일조한다. 조현아 작가의 원작 네이버 웹툰 ‘연의 편지(2018)’는 소리가 눈을 감고 호연과 동순의 숲속 비밀 아지트를 찾는 장면을 한 면에 담아 사실적으로 연출했다. 영화는 소리가 눈을 감아 외부를 향한 시각이 차단됨에 따라 짙게 깔리는 어둠과 그녀의 내면에서 상상을 통해 찬란한 이미지로 솟아나는 숲의 풍광을 함께 그렸다. 이 연출은 영화 매체의 역동성을 영리하게 활용함으로써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감정을 구축하고자(186쪽)” 했던 영화 자신의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다고 판단된다.
약간 아쉬운 면들도 있다. 우연에 상당히 의존하여 사건들이 전개되는 지점이 비교적 많아 보이는 면은 한계로 지적될 만하다. 성우들의 음색과 발성과 연기는 모두 고르게 뛰어난 편이나, 몇몇 대사들의 문체가 다소 교육용 영화에 나올 법한 문어적 경직성을 띠는 면도 있다. 하지만 바르게 다듬어진 문어체가 반드시 단점인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대사의 내용이 정제되어 명확히 전달될 수 있다는 장점도 크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의 한계를 이해하는 일에서보다 중요한 관건은 학교 폭력에 대한 소리의 용기와 그녀가 동순과 함께 추억을 통해 호연의 편지들을 찾아 나가는 플롯을 어떻게 선명히 연결할 수 있는지에 놓였다고 여겨진다. 양자의 연관성이 작품에 깃들어는 있으나, 양자를 연결하여 이해하는 일이 꽤 어렵고 그 연관성도 희미해 보인다. 물론, 원작과 영화 모두 양자의 연관성을 고려했다고 보인다. 웹툰에서는 비교적 간단히 다루어졌던 안승규의 퇴학 처리 과정을 더 명료히 극화한 영화의 각색은 정의의 윤리적 의미를 숙고한 결과일 것이다.
영화비평의 윤리는 영화 속의 요소들이 연(緣)을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기화함으로써 그 작품을 도울 수 있다는 점에도 놓인다. 이 영화(평론)에서 그 유기화의 뿌리는 기억이다. 소리가 학교 폭력 피해자 김지민을 도운 선행은 둘에게 “잊지 못할(141쪽)” 기억을 남긴다. “호연이랑 함께한 곳들을 거슬러(91쪽)” 가는 동순의 회상과 호연을 위한 소리의 원초적 선행은 호연의 기억을 열 편지에 아로새긴다. 지민은 전학한 새 학교에서 과거의 자신처럼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학생을 위해 소리로부터 입었던 사랑에 힘입어 그 괴롭힘을 중지시킨다. 소리의 윤리적 과거가 지민과 호연이 예측 불가한 우연적 미래로 도약하는 선한 용기를 창발한 셈이다.
소리·지민·동순·호연은 이렇게 찬연한 연시를 함께 지었고, 앞으로도 지어 나갈 것이다. 이 글의 윤리는 ‘연의 편지’를 반딧불의 연시로 “평생 기억할 것(97쪽)”에서 창조된다.
영화 ‘연의 편지(2025)’ 줄거리 요약
학교 폭력 피해자 김지민을 도운 여중생 이소리는 집단 괴롭힘을 겪게 된다. 결국, 두 소녀는 각자 다른 학교로 전학한다. 새로 전학온 청량중학교에서도 학교 폭력 트라우마로 소외감을 느끼던 소리는 자기 책상에 누가 편지를 남겼음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 편지는 다음 편지가 어느 책에 연관됨을 알린다. 그 책에는 박동순의 학교 백일장 수상 시 ‘별똥별’이 있었다. 소리는 편지들을 찾아가면서 학교를 이미 떠난 정호연이 편지들을 남겼음을 알게 된다. 그의 친구 동순과 친해진 소리는 동순이 호연과 나누었던 추억 및 동순이 안승규의 방화에 얽히었던 악연을 알게 된다. 지민의 편지를 읽고 자기 도움이 그녀의 선한 용기를 돋웠음을 안 소리는 승규의 악행을 동순과 함께 처단한다. 소리와 동순은 호연이 쓴 마지막 편지를 찾아 호연을 만난다.
김용환 감독 소개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대학 때 시작한 김용환 감독은 조현아의 네이버 웹툰 ‘연의 편지(2018)’를 각색해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연의 편지’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한국만의 아름다운 풍경과 감성이 담긴 기찻길들을 미술감독과 함께 직접 조사했다. 그는 이소리의 호의가 그녀 자신의 용기를 성장시키는 영화의 구조를 박동순의 이야기와 정호연의 편지가 담은 비밀에 자연스럽게 맞물리도록 구성하는 데에 힘썼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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