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관한 단편소설이 있다. 김채원의 ‘별 세 개가 떨어지다’. 삶과 죽음을 사유한다. 요즘 젊은 세대의 소설에서는 흔하게는 만나기 어렵다. 구성은 다소 어수선하다. 여러 장면이 하나의 주제로 충분히 응집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사유도 조금은 어설프다.
화자인 ‘나’는 사촌 혜임과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는 종묘원 가까이에 혼자 산다. 식물을 돌보며 지낸다. 과거에는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소설에서 종묘원은 중요한 공간이다. 씨앗과 묘목을 키우는 곳이다. 나무는 잎을 내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떨어진다. 생성과 성장과 소멸이 되풀이된다. 그런데 바로 이 생명의 공간에서 한 남자가 죽는다. 생명과 죽음이 한 장소에서 만난다.
할아버지는 종묘원에서 그 남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시신을 흙으로 어설프게 덮어 두었다. 그러면서 손녀들에게 말한다. “이 사람, 죽어도 너무 죽은 거야” 또 “죽어도 너무 죽었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강렬하다. 죽은 사람은 잠든 사람이 아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할아버지는 시신 앞에서 그 사실을 감각한다.
더 주목되는 것은 매장 장면이다. 시신의 두 발이 흙 밖으로 나와 있다. 손녀들이 그것을 마저 묻으려 한다. 할아버지는 “그래야지. 안 그러면 후회할 거야”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죽은 자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오래된 감각이 있다.
그런데 왜 정작 자신은 죽은 남자를 어설프게 묻었나? 모순이다.
죽은 자를 묻는 것은 오래된 문학적 주제다.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죽은 오빠를 묻는다. 왕의 법보다 오래되고 높은 법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루지기타령’에서도 변강쇠의 죽음 뒤에는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고 묻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죽은 자가 죽은 자의 자리로 가지 못하면 산 자의 세계도 편안해지지 않는다.
매장은 죽은 자를 이승과 다른 법칙의 세계로 보내주는 행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확정하고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법칙의 승인이다. 인간은 죽은 사람을 되돌릴 수 없다. 그를 보내야 한다. 흙 밖으로 나온 두 발을 마저 묻는 행위는 이런 의미를 환기한다.
종묘원의 식물과 나무도 그렇다. 나무는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때가 되면 떨어진다. 자연에서는 생성과 소멸이 하나의 질서 속에 있다. 인간 역시 그 질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죽은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묻고 보낸다. 자연의 죽음에 인간적인 의미와 의례를 부여한다.
마지막에는 세 개의 열매가 떨어진다. 할아버지와 혜임과 ‘나’가 그것을 함께 본다. 화자는 그 광경을 “별 세 개가 떨어”지는 것으로 느낀다. 그리고 “너무 환하고, 또 너무 무서운”이라고 한다. 살아 있음은 환하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언젠가 떨어진다. 그래서 무섭다.
이 결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앞선 이야기들이 여기로 충분히 모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삶과 죽음을 묻고, 죽은 자를 묻는 행위를 통해 인간을 넘어선 법칙을 떠오르게 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오래된 질문을 오늘의 젊은 소설이 꺼내든 점. 그것이 오래 남는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