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다른 사람들은 하나의 나가 아닌가? 그런데도 나만 살려 하고, 나만 사람이려 하는가? 너는 나에겐 너지만, 너에겐 나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너가 자신을 지칭할 때 ‘너’라고 하고, 나를 지칭할 때 ‘나’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나가 너를 부정하는 것처럼, 너도 하나의 나로서, 너에겐 너인 나를 부정할 수 있다는 뜻인가?
혹은 이쪽의 나와 그쪽의 나는 같은 나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이쪽의 나는 그쪽의 나를 부정할 수 있지만, 그쪽의 나는 이쪽의 나를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인가? 혹은, 어찌됐든, 나만, 내 관심만 생각하고, 내 이익만 보고 싶다는 뜻인가? 그리하여 ‘그냥’ 힘으로만 ‘하자’는 얘기인가?
우리는 모순(矛盾)의 뜻을 잘 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다는 창과 가장 단단하다는 방패를 동시에 선전하며 파는 사람에게,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으면 뚫릴 것이냐 아니냐를 물었다. 이런 뚫음과 안 뚫림의 동시가 불가할 때, 모순이라 한다.
아무래도, 나만 나이고 나만 사람인 것은 모순인 것 같다. 나만 나이려 하고 나만 사람이려 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다. 나만 나일 수 있고 나만 사람일 수 있는 것은 모순인 것 같다.
말하는 사물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지칭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외부의 사물은 늘 지칭을 당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에게까지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이때, 누가 불러도 같은 이름이 있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이름이 있다. 누가 불러도 같은 이 이름은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남이 붙여준 이름이다.
갑동이는 자신을 ‘갑동이’나 ‘나’라고 부른다. 갑순이는 그러나 같은 갑동이를 ‘갑동이’라고 부르지만, ‘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갑동이를 ‘나’라고 부르지는 못하는 갑순이도 자신을 지칭할 때는 ‘나’라고 부른다.
남이 지어준 갑동이의 이름은 갑동이의 전유물이지만, 갑동이 자신이 부르는 ‘나’라는 이름은 갑동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원래’ 갑순이는 갑동이에게 ‘너’였고 ‘너’라고만 불리었는데, 이제 갑순이 자신이 부르니, ‘너’는 ‘나’로 변한다.
고유명사(固有名詞) ‘갑동이’는 객관적으로 변하지 않는 이름이지만, 대명사(代名詞) ‘나’는 주관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이름이다. 말의 표현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지시하는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 있다. 말하는 자에게 가까운 것을 ‘이것’이라고 하고 먼 것을 ‘저것’이라고 하듯이, 자신을 ‘나’라고 하고 남을 ‘너’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에게만 나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나만 살지 않는다. 많은 나들이 있다. 사람들은 다 같이 나다. 그리고 다 같이 너다. 그리고 나만 사람이 아니고, 나의 입만 먹는 입, 말하는 입이 아니다. 사람들은 다 같은 사람이다.
입은 다 같은 입이다. 그러니 다 같은 사람으로서, 다 같은 나로서, 다 같이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음을 인식, 인정하고 추구하는 함께가 ‘큰 함께’의 기본이라 할 것이다.
나도 사람 너도 사람이고, 나의 삶은 너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나만 나다’라는 ‘함께 같지 않은 함께’보다, 보다 ‘괜찮은 함께’의 길을 끊임없이 찾아가야 할 것이다.
소통을 통해 우리는 보다 ‘괜찮은 함께’에 대해, 함께 생각을 열고 나누고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소통크기도, 함께의 크기를 키우는 맥락에서 물어질 수 있다. 그리고 함께의 크기는, 결국은 함께 사는 사람들 개개인의 행복크기, 사람크기를 키우는 맥락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큰 우리’, ‘큰 함께’는 다시 나 홀로의 삶의 크기를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공선 내지 사회정의도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 다른 사람들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도 너와 똑같은 사람도, 이 세상 에서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또, 나라고는 하지만, 나도 나와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Identity가 같음, 동일함에서 정체(正體), 정체성으로 된 것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나의 정체는 없는 것이다. 나의 외모도 끊임없이 변하고, 나의 내모도 시시각각 변하는 속에서, 어떤 것이 변치 않는 동일한 나일 수 있을까? 나도 너도 모두 변화 속에, 바뀜 속에, 달라짐 속에 운명적으로 내쳐져 있다.
그리고 너도 나라고 하지만, 이는 나든 너든, 같은 유(類)의 사람으로서 자신을 지칭할 때, 불리는 이름이 같다는 의미다. 이렇게 나와 너는 이름이 같고 또 같은 유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만이 나이려 하고, 내 생각만을 인정하려 하고, 내 이익만을 관철하려고, 남들의 있음을 없음으로 여기려 할 때, 나는 ‘나 중심주의’(egocentrism, meism)에 빠지게 된다.
지구를 중심으로 보는 지구중심주의(geocentricism)도, 중국을 중심으로 보는 중화주의(sinocentrism)도, 특정한 인종을 중심으로 보는 인종주의(racism)도, 남성을 중심으로 보는 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도, 인간을 중심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도 모두 일종의 나 중심주의라 할 것이다.
나 중심주의는 위 중심주의, 다수 중심주의와 직간접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나도 사람, 너도 사람이라면, 이는 나와 다른 ‘너’지만, 조사 ‘도’와 함께 ‘다르지만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는 사람도 존재자, 자연도 존재자라는 환경윤리의 주장으로 더 나아간다.
사람들은 종종 중심을 잡으라고도 하지만,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외적 크기로써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고, 중심을 위주로 생각하면서, 주변, 소수, 약자를 누르고 배제하는 이런 중심주의는 원활한 소통, ‘큰 소통’을 방해하는 걸림돌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중심주의는 일종의 수직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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