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퍼블릭(public)은 우리말로 명사일 때는 ‘공중’, 형용사일 때는 ‘공적’으로 번역되곤 한다. 달리 말하면, 공적인 영역이란 익명의 거대한 집단인 공중이 존재하는 공간, 혹은 그들이 합의와 논쟁을 하는 공간이라는 말이 된다.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생각한 ‘퍼블릭’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별은 크게 프랑스혁명을 전후로 나뉜다. 다나카 다니쿠치에 따르면, 18세기에 ‘공적인 것’은 엄밀히 말해 ‘사적인 것’의 반대말이 아니라, ‘특수한’의 반대말로 간주되었다.
공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을 함축했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이 구분을 명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공적인 것이란 인류 보편의 가치를 갖는 것, 어떠한 권위에도 종속됨 없이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을 뜻했다. 반대로, 당시의 사적인 것이란 특정 권위에 종속된 것, 혹은 특정 지위를 점유한 국가관료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간주됐다.
이런 구분법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을 통칭해 ‘공인’으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문법과 크게 대비된다. 국가행정직의 주요 관료 혹은 왕조차도 인류 보편의 가치와 대비되는 행동과 발언을 할 때는 사적인 행위를 했다고 간주됐다.
오늘날의 사적인 것의 개념과 구별되는 이런 구분법은 18세기 인쇄문물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형성됐다. 주지하다시피, 인쇄문물이 발전하여 신문과 책의 보급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사람들의 소통을 지배해 온 것은 일상의 면 대 면 관계였다. 면 대 면 관계는 말하고 듣는 이가 공유하는 좁은 생활세계가 화두의 전부가 되고, 그 둘 간의 공동체 내 지위가 소통의 맥락을 좌우하는 바탕이 되곤 한다.
그런데, 신문이나 책의 보급을 통해 저자와 독자라는 익명의 추상적 관계가 형성됐다. 공중이라는 익명적 집단은 ‘인류’라는 추상적 존재를 상상했고 면 대 면 관계의 구체성을 사적인 것으로,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적인 것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만들어가야 할 ‘퍼블릭’
18세기는 계몽사상이 부상하던 시대였고 문해력을 갖춘 엘리트들은 공론장의 추상적 소통망을 접하며 사고의 추상성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때 강력하게 등장한 관념 중 하나는 ‘인류’라는 개념이었다. 어떠한 구체적인 지위나 생활환경의 제약과 무관한 보편 본질로서의 인류는 무엇인가. 인류가 수호할 보편 가치와 진리는 무엇인가 등이 당대의 화두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전개되며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빠져든다. 혁명 후 프랑스의 과제는 신분제 없는 자유와 평등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인류의 보편 가치를 수호할 국가가 형성되어야 했는데, 문제는 그 국가의 형성을 누가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수호해야 하는데, 아직 그 자유의 가치를 내면화한 국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당대 지식인들은 두 가지의 갈래에서 고민했다. 하나는 계몽의 역할이 과거의 주술적 혼란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혁명기 지식인들에게서 가장 절대적인 진리는 수학 혹은 자연과학적 진리라고 간주됐고, 계몽을 위한 공교육의 핵심 화두는 무지한 민중들에게 보편적 지식을 일깨워주는 것이 됐다. 이 보편적 지식은 민중들 스스로를 자유케 하리라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몽의 기획 이후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남았다. 국민은 ‘인류’와는 달리, 완전한 추상적 상상물이 아니라는 것, 영토적 경계를 갖고 준-가족관계처럼 상호 간의 우애를 기반으로 타 국민들과 대립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혁명기 국민국가 건설과정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안류’보다는 ‘조국’을 강조하고 보편적 진리만큼이나 조국의 우애에 기반한 ‘덕’의 함양에 주목했다.
1792년 공교육위원회에서 생테티엔은 공교육과 국민교육을 구별하며 이렇게 말한다. “공교육이 정신을 밝히고 훈련을 시킨다면, 국민교육은 심성을 형성해야 한다. 전자가 지식을 전수한다면 후자는 덕성(virtus)을 전수해야 한다.... 국민교육은 모든 이들에게 같은 모유를 주고, 모두를 형제로 여기며 길러낸다. 공통의 마음가짐을 통해 양육된 한 인민집단이 지구상의 다른 인민집단과 구별되도록 서로의 공통점을 알려주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전수해주는 것이다.”(다니구치의 <빈민과 공화국>에서 재인용)
이제 공적인 것은 단순히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게 됐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과 조국적 가치를 갖는 것, 혹은 보편적인 것과 당파적인 것의 모호한 혼합물이 되었다. 추상적 독자층으로서의 공중 역시 이제 우애의 덕성을 갖춘 ‘국민’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국가의 주요 관료 등이 언론을 통해 하는 발언들은 모두 조국적 가치와 함의를 갖는 것으로서 공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프랑스혁명 후 유럽은 민족주의가 크게 발흥하게 되는데, 이는 18세기적 ‘인류’ 개념에 대한 19세기적 ‘국민’ 개념의 우세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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