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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쟁(擊錚)도 없는데…지부상소(持斧上疏)나 해볼까
김종우의 ‘네자이슈’‘…“소통이 끊기니 조선으로 가고 싶소”
김종우 필진페이지 + 입력 2013-04-26 00:02:44
 ▲ 김종우(자유기고가)
조선시대에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사건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있도록 설치했다는 신문고(申聞鼓).
 
‘민의(民意) 상달(上達)을 위한 민주적 제도장치’로 알려져 있는 신문고는 1401년(태종 원년) 7월에 등문고(登聞鼓)라는 이름으로 설치됐다. 중국의 상소 제도를 본뜬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토호(土豪)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태종의 뜻을 읽은 신료들이 중국 송나라 태조가 등문고를 설치해 하정(下情)을 들었다는 사실을 고하면서 이에 의거해 설치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백성이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을까? 조선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자는 그 내용을 서울은 주장관(主掌官)에게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리하고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라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바로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또 소장을 올리려면 글로 써야 하는데 일반 백성이나 천민은 글을 알지 못하니 이용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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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신문고가 있는 곳도 대궐이어서 지방에서 올라오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때 총 41건의 사례가 나온다. 그런데 신문고를 친 사람 중 천민은 한 건에 그친다.
 
나머지는 양반(90%)과 중인(7%)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반 백성은 근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제도’였다는 방증이다.
 
신문고의 기능은 ‘청원, 상소, 고발’ 세 가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 때인 1420년에 ‘하극상 금지’를 명시하면서 청원과 고발 기능이 사라졌다.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통해 개인적 억울함만을 호소하는 상소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어찌됐건 이때부터 요즘 언론의 고발 장치와 같은 역할이 사라지면서 민의 상달은 사실상 실종되었다. 단지 소수 지배층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결국에는 세조 때 시간을 알리는 누고(漏鼓)를 신문고로 잘못 알고 친 사건이 일어나면서 폐지, 이후에도 복원과 폐지를 반복하다가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는 제도가 조선시대에 있었다.
 
억울한 일을 글로 써서 왕이나 높은 고관들이 행차할 때 올리는 상언(上言), 글을 모르는 백성이 왕이나 고관들이 행차할 때 징을 쳐 억울함을 말로써 고하는 격쟁(擊錚) 제도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 그런데 한 사람이 꽹과리를 치기 시작한다.
 
임금의 행차 때 징이나 꽹과리를 친 뒤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고 있다. 이름 하여 격쟁(擊錚)이다. ‘글을 모르는 평민과 천민을 위한 소원(訴願) 제도인 격쟁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상언(上言)이다. 이 역시 사민(士民)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원 제도이다.
 
이러한 두 제도는 신문고(申聞鼓)에 연원을 두고 발전되어 18세기에는 일반적인 제도로 자리 잡았다. 한마디로 민의(民意)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소통의 정신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렇게 평(評)하고 있다.
 
“물론 격쟁이라고 해서 아무 일이나 다 올릴 수는 없다. 본래 네 가지 일만 격쟁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사건사(四件事)’라고 부른다.
 
사건사는 형벌에 따라 죽임을 당함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형륙급신, 刑戮及身), 부자 관계를 밝히는 일(부자분별, 父子分別), 정실 자식인지 첩의 자식인지를 가리는 일(적첩분별, 嫡妾分別), 양인인지 천인인지를 가리는 일(양천분별, 良賤分別)이었다.
 
또 ‘신사건사(新四件事)’가 있었다. 이는 자손이 아버지, 할아버지를 위한 것, 처가 남편을 위한 것, 동생이 형을 위한 것, 노비가 주인을 위한 것 등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격쟁과 상언은 세도 정권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집안인 벌열(閥閱) 가문(家門)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백성들은 이런 소원 제도를 적극 활용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제대로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비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의 억울함을 적극 해소하려 노력했다.
 
일례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든가(와언, 訛言), 산에 올라가 욕지거리를 하며 정치를 비판한다든가(산호, 山呼), 이름을 숨기고 글을 써서 정부를 비난하는 방법(괘서, 掛書)을 통해 그들의 의사를 적극 표현했던 것이다. 현실을 적극 비판하는 대정부 투쟁이었던 것이다.
 
본래 격쟁은 당사자가 해야 했지만 영조는 자손, 아내, 형제, 노비가 대리로 격쟁을 할 수도 있게 허용해 주었다. 이런 허용 대신 부당한 격쟁에 대한 형벌도 더 강화했다.
 
또한 정조는 사건사(四件事)에 더해서 백성이 고통스러워하는 일에 대해서 격쟁할 수 있도록 조건을 넓혀주었다.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로 행차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때마다 백성들이 격쟁을 했다.
 
어떤 이는 한 가지 사안을 가지고 일곱 번이나 격쟁을 하기도 했을 정도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회남자(淮南子)의 범론훈(氾論訓)을 보면 중국 우(禹)나라 임금의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우 임금은 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우 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일궤십기, 一饋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했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라고 했다.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야(一饋十起) 할 정도로 통치자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있다.
 
일궤십기( 一饋十起)라. ‘한 끼 식사에 열 번 일어서기 즉, 위정자가 백성들을 위하여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로부터 상소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장 강도 높은 메시지를 담은 지부상소(持斧上疏)이다. ‘도끼를 짊어지고 대궐 밖에 꿇어앉아 상소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차라리 도끼로 목을 쳐달라’는 극약 처방이었다.
 
상소(上疏)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왕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를 제어하면서 유교정치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던가.
 
때문에 올라오는 상소는 왕의 의사결정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때론 왕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왕은 국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자리에 들기 전 상소문만은 반드시 챙겨 읽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밤 9시 이후 을야(乙夜)의 상소문 읽는 것을 을람(乙覽)이라고 불렸다.
 
옛 선비의 예를 들어본다.
 
중봉(重峯) 조헌 선생은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자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했다.
 
또 면암(勉庵) 최익현 선생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해 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렸다가 흑산도로 유배를 당하면서도 상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목숨마저 기꺼이 국가를 위해 바쳤다.
 
조헌은 금산에서 왜군과 끝까지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으며, 대마도로 끌려간 최익현은 “내 늙은 몸으로 어찌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 너희들이나 살아 돌아가서 나라를 구하라”라며 끝내 일본의 음식을 거절하다가 대마도에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요즈음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면서 단적으로 드러난 인사의 난맥상을 두고 정치 세간에선 ‘소통 불능의 산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위기라 일컫는 민생 파탄 지경에 이른 지금. 전근현대사를 통틀어 지금처럼 어려움이 큰 적이 없을 정도라는 비아냥거림도 심심찮게 들린다. 가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다.
 
항상 소통이라는 것은 ‘발전의 원동력’이 아니던가. 소통이 끊기면 항상 나라는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난세에, 파탄의 세상에서 이를 구제할 구원 투수 한 두 사람만으로 혼란스런 정국을 해결할 수는 없질 않은가.
 
신문고(申聞鼓)도, 상언(上言)도, 격쟁(擊錚)도 없는 세상. 지부상소(持斧上疏)도 못하니… 갑자기 조선조 옛 시절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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