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우(자유기고가)
‘민의(民意) 상달(上達)을 위한 민주적 제도장치’로 알려져 있는 신문고는 1401년(태종 원년) 7월에 등문고(登聞鼓)라는 이름으로 설치됐다. 중국의 상소 제도를 본뜬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토호(土豪)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태종의 뜻을 읽은 신료들이 중국 송나라 태조가 등문고를 설치해 하정(下情)을 들었다는 사실을 고하면서 이에 의거해 설치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백성이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을까? 조선 성종 때 완성한 경국대전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자는 그 내용을 서울은 주장관(主掌官)에게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게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리하고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라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바로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또 소장을 올리려면 글로 써야 하는데 일반 백성이나 천민은 글을 알지 못하니 이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신문고가 있는 곳도 대궐이어서 지방에서 올라오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때 총 41건의 사례가 나온다. 그런데 신문고를 친 사람 중 천민은 한 건에 그친다.
나머지는 양반(90%)과 중인(7%)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반 백성은 근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제도’였다는 방증이다.
신문고의 기능은 ‘청원, 상소, 고발’ 세 가지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 때인 1420년에 ‘하극상 금지’를 명시하면서 청원과 고발 기능이 사라졌다. 이른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통해 개인적 억울함만을 호소하는 상소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는 제도가 조선시대에 있었다.
억울한 일을 글로 써서 왕이나 높은 고관들이 행차할 때 올리는 상언(上言), 글을 모르는 백성이 왕이나 고관들이 행차할 때 징을 쳐 억울함을 말로써 고하는 격쟁(擊錚) 제도이다.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 그런데 한 사람이 꽹과리를 치기 시작한다.
임금의 행차 때 징이나 꽹과리를 친 뒤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고 있다. 이름 하여 격쟁(擊錚)이다. ‘글을 모르는 평민과 천민을 위한 소원(訴願) 제도인 격쟁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상언(上言)이다. 이 역시 사민(士民)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원 제도이다.
이러한 두 제도는 신문고(申聞鼓)에 연원을 두고 발전되어 18세기에는 일반적인 제도로 자리 잡았다. 한마디로 민의(民意)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소통의 정신이다.
“물론 격쟁이라고 해서 아무 일이나 다 올릴 수는 없다. 본래 네 가지 일만 격쟁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사건사(四件事)’라고 부른다.
사건사는 형벌에 따라 죽임을 당함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형륙급신, 刑戮及身), 부자 관계를 밝히는 일(부자분별, 父子分別), 정실 자식인지 첩의 자식인지를 가리는 일(적첩분별, 嫡妾分別), 양인인지 천인인지를 가리는 일(양천분별, 良賤分別)이었다.
또한 정조는 사건사(四件事)에 더해서 백성이 고통스러워하는 일에 대해서 격쟁할 수 있도록 조건을 넓혀주었다.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로 행차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때마다 백성들이 격쟁을 했다.
어떤 이는 한 가지 사안을 가지고 일곱 번이나 격쟁을 하기도 했을 정도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에 우 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일궤십기, 一饋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했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라고 했다.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야(一饋十起) 할 정도로 통치자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있다.
일궤십기( 一饋十起)라. ‘한 끼 식사에 열 번 일어서기 즉, 위정자가 백성들을 위하여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상소(上疏)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왕의 독단적인 권력 행사를 제어하면서 유교정치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던가.
때문에 올라오는 상소는 왕의 의사결정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때론 왕을 압박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결국 목숨마저 기꺼이 국가를 위해 바쳤다.
조헌은 금산에서 왜군과 끝까지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으며, 대마도로 끌려간 최익현은 “내 늙은 몸으로 어찌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 너희들이나 살아 돌아가서 나라를 구하라”라며 끝내 일본의 음식을 거절하다가 대마도에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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