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 : 8>
문득 춘풍추상(春風秋霜)이 떠오른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서리처럼 엄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2년차이던 2018년 2월 ‘춘풍추상’이라고 쓴 액자를 비서실에 돌렸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문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언행의 일치를 보이지 않았다. 남에게는 ‘춘풍추상’ 같이 살라 해놓고 정작 본인은 그 반대의 삶을 살아왔음을 지적하고 싶다. 상대방을 대할 때는 엄하게 굴고, 자기편을 대할 땐 봄바람처럼 보들보들하게 했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대할 땐 추상같았지만, ‘조국 법무부장관’을 대할 땐 춘풍 같았다. 항간에선 이를 두고 ‘내로남불’이라 불렀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2013년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에서 당시 윤석열 수사팀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수사 외압을 폭로하면서 던진 말이다. 윤석열은 이 한마디로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꿨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갈등과 모순이 탄생시킨 인물이 됐다. 검사로서 정의와 공의를 지켰을 뿐인데, 박근혜 정권을 겨냥한 문재인 정권의 칼잡이가 되면서 역사가 바뀌는 이변을 낳았다. 조국 사태를 계기로 확실한 상징 자본이 필요했던 불임(不姙) 야당의 선택을 받아 국민 다수가 원하던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살부(殺父)’라는 가혹한 운명의 힘으로 오이디푸스 서사(敍事)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5월이면 ‘여소야대’ 구도 아래 윤석열 정부가 새롭게 출범한다. 국민의힘 의석은 110석에 불과하다. 새 정부를 견제할 더불어민주당은 172석, 거기다가 진보성향의 무소속 6명까지 합치면 모두 179석에 이른다. 이 구도가 오는 2024년 4월 총선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느 정부든 처음 2년이 제일 중요한데 벌써부터 민주당은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있느냐”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윤석열 당선인은 자신이 국민에게 공약한 대로 청와대를 떠나겠다며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를 새 대통령 집무실로 정했다고 밝혔다. 또한 ‘새 집무실 명칭은 국민 공모로 정하겠다’며 ‘청와대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은 윤 당선인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청와대가 때 아닌 안보를 내세우며 청와대 이전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주재한 가운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고 새 정부 출범까지 청와대 이전 계획은 다소 무리한 면이 있어 보인다며 더 준비된 가운데 이전을 추진하는 게 순리라고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는 순간부터 정권 인수인계가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충돌하는 것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윤 당선인은 20일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긴다고 발표를 한 바 있다. 바로 이튿날 문 대통령은 보란 듯이 제동을 걸은 것이다. 청와대 측은 예비비 안건도 국무회의에 상정조차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용산 충돌 때문에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이 또 어려워졌다. 문 대통령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 군 통수권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며 “국정에는 작은 공백도 있을 수 없다. 특히 국가 안보와 국민 경제, 국민 안전은 한순간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 지도자든, 일반 시민이든 메시지의 진정성은 얼마나 일관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수년간 보인 언행과 일치하지 않으면 지켜보는 이들은 고개를 갸웃하게 마련이다. 임기를 50여일 남겨둔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안보를 강조하는 메시지가 그렇게 느껴진다. 용산 이전을 놓고 안보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한편으로는 그런 우려가 타당하다. 그러나 임기 5년 내내 숱한 북한 도발에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문 대통령이 느닷없이 신구 정권 인수인계 국면에서 연일 안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강조하는 것은 생각이 있는 국민들로서는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간의 문 대통령의 행실을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들어서만도 문 정부는 북한이 각종 미사일을 계속 발사해도 ‘도발’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국방부조차 주적 개념이 없어졌다. 더구나 유엔 대북 규탄 결의안에도 세 번 불참했다가 최근 들어서야 입장을 바꾼 문 정부가 아니던가. 북한 김여정이 “‘도발’이란 막돼먹은 용어”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지적하자 곧바로 문 정부 안보 수장들은 도발이 아닌 ‘위협’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수백억원 국민의 세금을 투자한 개성공단연락사무소를 폭파했을 때도 어느 부처, 어느 시민단체도 항의 한번 하는 곳이 없었다. 한술 더 떠 여당 대표라는 자는 “미사일로 안 쏜 게 어디냐”는 말을 하면서 국민의 귀를 의심케 했다. 국민은 우리 공무원이 서해 찬 바다에서 피살돼 불에 태워지며 시신이 훼손되고 탈북한 젊은 어부들이 눈이 가려진 채 강제 북송 되는 걸 지켜봤다.
북한이 군사도발을 해도, 대통령에게 ‘삶은 소대가리’ ‘특등 머저리’라고 모욕을 해도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좀 더 인내를 갖고 과감하게 대화하자”는 속내를 보인 정부였다. 그러면서도 왜 그리 종전선언을 서둘렀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간첩으로 복역한 자를 존경한다는 문 대통령이었다. 문 대통령은 현충일 ‘남침’ 대신 북한군의 ‘남하’ 라는 말을 했다. 세계 각국의 군인들이 전쟁영웅으로 칭송하는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장례식에는 참석치 않으면서도 러시아에서 독립군을 전멸시킨 자는 영웅대우를 하며 시신이 공항에 도착하자 공항까지 가고 국립묘지에 묻게 했다.
세월호 추모식, 5·18묘소에는 때만 되면 빠짐없이 참석하면서도 정작 천안함 희생자 추모식엔 참석치 않다가 2020년 이후에서야 관심을 보인 것처럼 했다. 한마디로 위협의 주체를 희석해버린, 국민의 자존심마저 무참하게 무너뜨린 지난 5년이었다. ‘안보엔 신경도 안 쓰던 정부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 이야기가 나오자 안보를 빌미로 트집을 잡고 있다.’ ‘6월 지방선거 앞두고 국가 안보가 아닌 정권 안보가 비상이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는 용산 이전 비용을 놓고 국민의 세금을 그렇게 함부로 쓸 수 있느냐고 하는데, 5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은 대선 때처럼 모금을 해도 가능한 돈이다. 이참에 문 대통령의 과잉 경호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현재 군인과 경찰까지 포함 무려 3000여명이 청와대를 에워싸고 있다. 그러니 시민들이 그런 철통 같은 경비를 하는 청와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겠는가. 문 대통령은 이를 의식, 경호처를 폐지하겠다고 했지만, 무엇이 두려운 건지 오히려 정원을 532명에서 693명으로 30%나 늘렸다. 그런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는 인사권까지 행사하려고 하면서 또 다른 무리수를 두고 있다.
윤 당선인의 최대 무기는 정치적 채무가 없다는 거다. 따라서 여야를 넘나들면서 광폭 정치를 펼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최초의 서울 토박이 대통령이어서 정치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지역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유권자가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 신구 정권 갈등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구 정권은 임기만을 고집하지 말고 신 정권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옳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는 윤 대통령 당선인에게 달려 있다. 이미 청와대 도면이 북한 측에 넘어간 것은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 때 입증되지 않았던가. 그런 불안한 곳은 안 가겠다는 윤 당선인이다.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폭군이 죽으면 그의 지배가 끝나지만 순교자가 순교하면 그의 지배가 시작된다”고 했다.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 과연 어떤 길을 택해서 걸을 것인지. 정직한 머슴이 되기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필요하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윤 당선인을 믿고 싶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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