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도시 역사박물관 중 하나인 프랑스 파리 카르네발레 박물관(Musée Carnavalet)은 오스만 남작의 파리 도시정비사업이 한창이던 19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개발로 사라지는 도시의 모습을 어떻게 보존하고 기억할 것인가. 급격한 발전으로 도시가 변화하는 가운데 도시 유산을 보존하자는 지역 사회 운동과 개발론자들의 찬성 목소리가 팽팽히 맞서는 시점이었다.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를 박물관에 보존하는 방법을 완벽히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도시를 보존하기 위한 시도로서 카르네발레 박물관은 도시 경관이 담긴 사진과 기록뿐만 아니라 간판 등 건축물의 일부를 수집하며 전시를 구성했다. 거리나 거대한 건축물을 박물관 안에 완전히 옮겨놓을 수 없기 때문에 파리는 도시의 선택된 일부를 중심으로 도시의 과거를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상점의 성격을 알려주기 위한 간판과 길 안내를 도왔던 표지판은 박물관 안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매개체로서 작동한다. 기능적 요소로 길 위에 자리했던 요소들이 기억을 위한 연결고리로 시간 여행을 이끄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옆 나라 독일로 향해본다. 베를린은 박물관 밖, 도시 한복판에서 시간 여행을 선사하는 요소들이 도시 곳곳에 펼쳐져 있다. 건축물뿐 아니라 신호등 디자인까지 옛 도시의 문화와 기억으로 연결된다. 특히 통일 이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옛 동베를린의 귀여운 신호등 디자인이 인기다. 신호등의 이름은 앙펠만. 신호등을 뜻하는 앙펠과 사람을 뜻하는 만(mann)이 합쳐져 신호등 속 사람을 의미한다.
이 독특한 신호등 디자인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앙펠만 카페와 앙펠만 기념품 상점의 존재만으로도 인지할 수 있다. 박물관 안에서 옛 도시의 추억을 전하는 것을 넘어 현재 베를린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도시 역사의 아이콘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앙펠만은 옛 동베를린에서 탄생했다. 사실 독일은 통일 이후 동독의 모든 것은 버리고 서독의 것을 취하는 분위기였다. 신호등도 그중 하나였다. 모든 도시의 신호등이 서베를린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동베를린의 신호등이 디자인적으로 혹은 도시의 옛 모습을 상징하고 추억하는 매개체로 사용되리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예술가가 버려진 동베를린 신호등을 예술 상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조명이나 장식품에 불과했지만, 점차 예상외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됐다. 단지 소장하고 싶어서 구매한 이들도 있었고 동베를린의 옛 모습을 예술 작품으로나마 추억하고 싶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술가는 동독의 신호등 사인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 안에서 계속 만날 수는 없을까?’ 그는 곧바로 앙펠만을 설계한 디자이너를 찾아가 이를 의논했다. 수많은 시도 끝에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고 지금은 동베를린이었던 지역에서 실제 불이 들어오며 길을 안내하는 앙펠만을 만나볼 수 있다.
동베를린에 관한 박물관에서 역사 교육 자료이자 일부 사람들의 기억 매개체로만 작동할 뻔했던 신호등이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다. 디자이너와 예술가의 번뜩이는 생각과 실행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신호등을 동독 박물관에서 만났을 것이다. 이제 과거 동독과 서독을 이야기할 때 옛 동독의 앙펠만과 서독의 신호등은 나란히 각 진영을 대표하고 있다.
특이한 건물, 특이한 조명, 색다른 파사드(건축의 입면)는 분명 우리의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계속해서 변화하는 도시 안에서 어렸을 적 걸었던 길, 자주 다녔던 장소를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은 그때의 사진이나 영상을 다시 찾아보는 방법밖에 없다. 추억 여행을 위한 도시의 크고 작은 요소들이 너무나 빠르게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의 앙펠만은 사람들의 기억, 추억 그리고 기념의 순간에 함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베를린 장벽이 지나가던 포츠담 광장에서 나란히 서 있는 의 옛 서독과 동독의 신호등을 바라보며 미소 짓게 되는 이유이다. 무엇을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고 기념품에 담을 것인가라는 고민은 오히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또는 기억할 수 있는 도시의 매개체로서 어떠한 요소가 필요할까라는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다.
19세기 파리의 모습을 담고자 노력한 파리 카르네발레 박물관은 올해 상설 전시를 개편하며 코로나로 텅 빈 파리 거리의 사진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도시를 담은 모습이 박물관 한켠에 자리 잡아 내일의 우리를 위한 기억여행을 준비하는 셈이다.
내일 당장 내 주변의 공간이 변화한다는 생각으로 도시를 다시 걸어 본다면 다양한 장소에 시선이 더 오랜 시간 머물 것이다. 꽃이 피어 있는 작은 모퉁이 길가의 전봇줄, 가게 앞 노란 자전거 등 소소한 하나하나가 우리의 도시를 구성하고 있다. 사라지는 골목과 가게를 기억 속에 붙잡을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사진 이외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오갈 수 있는 다양한 도시의 모습을 관찰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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