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로부터 (기자)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받은 이성계는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해 억불론을 주장했음에도 무학대사 등의 공헌이 지대하다 보니 숭불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다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해나갔다.
그간 나라는 사찰과 승려에게 주었던 모든 혜택을 없애고 아예 사찰을 정리했다. 남은 사찰들은 모두 산으로 쫓겨 들어갔다. 물론 그간 불교가 기득권 세력이었기에 조선왕조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억불숭유정책이 실행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 단독으로 진행했다기보다는 명나라로부터의 고명(誥命) 과정에서의 뭔가 압력에 의해 추진되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으로 본다. 명나라의 속국 됨을 자청한 조선왕조의 사상을 소중화로 체질화시키려면 숭유정책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17년(1417) 6월1일에 괴서를 거두어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리라는 교지를 내린 행위는 후대 왕들이 내린 수서령의 효시가 되었다. “변계량이 말하기를 ‘서운관에 있는 괴서(怪書)는 모조리 불사를 수 있으나 사사로이 간직한 괴서까지 어찌 다 불살라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법을 세우면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이 말하길 ‘내가 서운관에 옛날부터 소장된 참서(讖書)를 모조리 불사르라고 했었는데 아직도 그대로 있단 말인가? (생략) 만약 참서를 불사르지 않고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를 판단 못하는 자들이 반드시 깊이 믿을 것이니 빨리 불살라 버리게 함이 이씨의 사직에 손실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세종과 문종의 치세가 지나가고 1453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가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세조(世祖)다. 아마도 명나라로부터 고명을 받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3년(1457) 5월26일 세조는 팔도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삼성밀기·안함노와 원동중의 삼성기·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의 삼인기록, 수찬기소의 100여권과 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의 한도참기 등의 서적은 마땅히 사사로운 곳에 간직해서는 안 된다.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원하는 서책으로 돌려줄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는 수서령을 내렸다.
참고로 수서령에 언급된 서적 중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구성하는 책이며,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삼성밀기 등은 책 내용의 일부가 환단고기에 그대로 인용되어 있어 우리 민족의 상고사인 환인·환웅·단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책들이었다.
그렇다면 세조가 갑자기 환단 관련 역사책을 거두어들이라는 수서령을 내린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조상인 환단의 상고사를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그 환단의 역사를 지워버리거나 밖으로 알려지지 않도록 감금시키기 위함이었다. 여차하면 불 태울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러한 수서령은 세조 당대에만 시행하고 그쳤던 게 아니라 왕이 바뀔 때마다 대를 이어 계속됐다. 세조가 죽고 둘째 아들 예종이 즉위해 1469년 9월18일 세조 때와 비슷한 내용의 수서령을 발동하면서 우리 환단(桓檀)의 역사가 수록된 책을 바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소지하거나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까지 경고했다.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요절하자 조카 자을산군(성종)이 보위를 이었는데 즉위하자마자 12월9일 역시 비슷한 내용의 수서령을 내렸다. 성종 즉위에 대한 고명 과정에서도 아마도 명나라로부터 상고사 왜곡을 종용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성종의 즉위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예종이 갑자기 죽자 4살짜리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너무 어려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즉위했다. 조정에서는 덕종의 장자 월산군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결탁 즉 성종의 장인이 천하의 한명회(韓明澮)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조선 조정에서 수서령을 내린 이유는 이런 책들이 민간에 있을 경우 민간의 역사관이 (기자)조선을 신봉하는 조정과 다르게 되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고, 또 궁극적으로 명나라의 문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나라의 안전을 고려해 조상인 환·단의 역사가 수록된 책들을 수거해 감금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민간에서 수거된 책들이 감금되었었다는 사실은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李陌) 선생의 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위대했던 환단의 역사가 급기야는 세상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세상이 된 것이었다. 이렇듯 궁궐의 비밀수장고에 감금되어있던 많은 역사책들은 아마도 임진왜란 때 불태워지고 일본에게 넘어갔거나 또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의 역사 말살을 위해 불태워졌거나 일본 궁내청 서고로 보내졌을 것이다.
“갑자년(1506년, 연산군 10년)에 내가 괴산으로 유배 가서 근신하고 있었기에 너무나 무료했던 터라 이에 집안에 보관되어 있던 오래된 상자를 열어서 읽어보니 역사와 전기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었고 또 평소에 노인들에게 들은 것을 함께 채록한 것이 있는데 책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 후 16년이 지난 경진년(1520년, 중종 15년)에 내가 찬수관이 되었기에 궁궐 내 전각에서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던 책들을 많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에 이전 원고를 순서대로 편집해 ‘태백일사’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감히 세상에 내지 못하고 비밀리에 소장하고는 문 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다. 일십당 주인이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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