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7년(1512)에 간행되어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완질본이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로 알려져 있다. 옥산본의 원본이었다는 태조 2년(1393) 간행 경주본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이 책 역시 불경죄(?)로 감금형이나 화형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태종 이방원은 즉위하자마자 2년(1402) 6월8일에 예문관 대제학 이첨(李詹)과 하윤(河崙)·권근(權近)에게 ‘삼국사’ 수찬(修撰)을 명해 이듬해 8월 완성되었는데 이를 ‘삼국사략’ 또는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고 한다. 주필은 서문과 전문과 사론(史論) 등을 쓴 권근이었다.
권근은 신라를 삼국의 주인으로 설정해 신라의 연기(年紀)를 기준으로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으며, 과거 삼국이 사용했던 주체적인 칭호들을 모두 삭제했다. 예를 들어 황실에서 쓰는 太后와 太子 등의 용어를 제후국에서 사용하는 大妃와 世子로 바꿨다.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 훗날 ‘삼국사기’가 각색되었다.
이는 하늘에 두 태양이 없듯이, 지상 유일의 황제는 중국의 황제뿐이라는 개념이었다.
태종과 그의 신하들은 명나라가 내려 주는 큰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대국을 받들어 모시는 충성심과 소국의 제후로서 지켜야 할 성리학적 명분 수호의 의지가 충만해 있었다. 삼국이 건원칭제한 것을 두고 중국에 불충한 것으로 인식했다.
권근은 집필 기간으로 보아 용어 정도만 바꾸었지 내용까지는 손대지 못했던 것 같다. 세종이 경연에서 일식(日食)에 대해 "내가 ‘삼국사’에서 보니, 일식을 신라에선 썼는데 두 나라는 쓰지 않았다. 태양이 침침한 구름에 가렸다 하더라도 어찌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는 보이고 다른 두 나라는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김부식·하윤·권근이 편수했는데, 그 쓴 것이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지적했다.
천하의 영명했던 군주 세종대왕도 일단 일식이 발생하면 삼국에서 동시에 관측되는 현상으로 알았던 것으로 보아 반도사관에 몰입되었고, 우리 삼국이 대륙 깊숙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세종은 14년(1432)에 조선왕조 최초의 지리지인 ‘신찬팔도지리지’를 완성시켰고, 28년(1446)에 개량된 정음을 반포했다. 태종·세종에 의해 점화된 우리 고대사 탄압은 세조·예종·성종 때 내려진 수서령(收書令)으로 민간에 있던 많은 고서적들이 수거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가 절정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 이후이다.
중종반정 이후의 역사 말살
중종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일파는 대의명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연산군의 역사 기록부터 모두 뜯어고쳤다. 현재 전하는 연산군에 대한 기록이 전부 악행뿐인 이유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롭게 왕이 된 중종에 대한 명나라의 고명도 쉽지 않았다. 멀쩡하던 임금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명나라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반정 세력은 연산군이 평소에 지병이 많아 건강상 이유로 이복동생에게 양위했다고 말했다. 명나라에서는 “양위하면 당연히 세자가 있는데 어떻게 이복동생이 왕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잘못하면 반정 세력들이 오히려 반역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세자를 비롯한 네 아들 모두를 죽이고는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둘러댔다.
명나라에서는 전왕(연산군)이 살아 있으니 신왕(중종)의 등극을 허락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바로 연산군을 죽이고는 “폐주가 갑자기 학질에 걸려 죽었다”고 꾸며댔다. 연산군이 겨울철인 음력 11월에 죽었는데, 어떻게 여름철에나 있는 모기가 옮기는 학질에 갑자기 걸릴 수가 있단 말인가!
명나라는 중종을 승인하는 대신 약점 많은 조선 조정에게 고대사를 스스로 말살하도록 요구했을 것이고 세조처럼 100% 수용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왕도 마음대로 바꾸었는데 그까짓 역사책 바꾸는 것쯤이야 그들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당시 이미 수거령에 의해 많은 고대 사서들이 감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중종의 집권 초기인 7년(1512)에 간행된 옥산본 이전 책들이 사라진 이유는 새로운 ‘삼국사기’가 나오면서 내용이 다른 이전 간행본들을 모두 회수해 파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명나라의 지침에 맞게 용어와 내용을 고치고 새로 간행까지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했을 것이다.
중종 37년 7월27일 어득강의 상소문에 “‘삼국사기’는 경주에서 간행해 그 판(板)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고려사절요’는 주자로 찍어 반포했는데 이를 본 유자(儒子)가 드뭅니다”라는 문구로 보아 비록 책은 없어졌지만 인쇄할 수 있는 판은 가지고 있었던 걸로 확인된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되어 현재 전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의 요동성이 황해도 수안에 안시성이 평안도 중화군에 그려져 있는 등 대륙에 있던 고대 지명들이 모두 한반도로 옮겨져 있다. 가까운 조상들의 먼 조상 죽이기가 이토록 처절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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