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어 있는 책. 빈 방에서 혼자 울고 있다….”
영화 ‘캐링턴’(1995)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엽총으로 자살하면서 여주인공 도라 캐링턴이 읊조리는 말이다. 미소년의 외모를 지닌 도라 캐링턴은 엠마 톰슨이 연기했고 상대역인 리트 스트래치는 조나단 프라이스가 연기해서 1995년 제48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실제로 17년간 이어진 도라 캐링턴의 리튼 스트래치를 향한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것이다. 동성애자였던 리튼 스트래치는 창문 너머로 한 미소년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건 짧은 머리의 화가 도라 캐링턴이었다. 두 사람은 이윽고 함께 살게 되지만 플라토닉한 관계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가슴 아픈 결말을 향해 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런던 블룸즈베리에 있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언니 바네사의 집이었다. 바네사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들과 함께 런던 북쪽의 블룸즈베리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집으로 예술가와 작가·지식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블룸즈베리 그룹’이 만들어진 것이다.
버지니아와 레너드 울프 부부, 버지니아의 언니인 화가 바네사 벨과 연인인 던컨 그랜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전기작가 리튼 스트래치, 비평가이자 화가인 로저 프라이를 중심으로 D.H. 로렌스와 에드워드 포스터, 바네사의 남편이 된 화가 클라이브 벨,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등…. 이들은 각각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20세기의 새로운 문화를 개척하고 일군 천재들이었다.
블룸즈베리 그룹의 리튼 스트래치는 엘리자베스 1세의 전기 ‘엘리자베스와 에섹스’를 썼다. 개인에 대한 일종의 찬미가 성격을 띠었던 이전의 전기 작품 스타일에서 벗어난 특별한 전기였다. 그는 미학적 감수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인물의 내면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문학 작품의 향기를 지닌 새로운 스타일의 전기를 만들어 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인물이다. 리튼 스트래치의 전기에 의하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녀가 사랑한 인물이 바로 젊은 에섹스 백작이었다. 두 사람의 감정의 얽힘이 주변 사람들과 다시 얽히고 그것이 역사의 장면들을 만들어 가며 결국 관계는 에섹스 백작 처형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남편 헨리 8세에게 죽임을 당한 ‘천일의 앤’, 앤 블린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가톨릭을 국교로 정하고 청교도와 성공회에 대한 탄압으로 ‘피의 메리’로 불리게 된 이복언니 메리 1세 치하에서 아슬아슬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여왕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영국을 대제국으로 키워낸다.
영국에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명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전쟁과 외교를 통해 나라를 키운 군주인 반면 엘리자베스 2세는 평온한 삶을 살며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나라를 손상 없이 고스란히 지켜 낸 왕이다. 누가 더 훌륭했는지 우열을 가리는 건 불필요하고 불가능한 일이다. 환경과 통치 스타일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국정을 운영하는 스타일은 리더의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보더라도 그렇다. 결과를 놓고 보면 국민의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리더에게 어떤 스타일을 규정해 국정을 운영해 줄 것을 요구하는 건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새 대통령은 취임한 지 반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스토리의 기·승·전·결을 놓고 보면 그는 아직 ‘기’의 단계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현 단계에서 대통령이 꼭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말을 할 때 중간 중간 “아, 에” 하고 뜸을 들이는 습관이다. 듣는 사람의 주의를 흩뜨리기 때문이다.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어떤 판단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새 정부의 국정 운영 시작 단계에서 야당과 언론이 힘을 합해 국민의 불만을 부추기고 있다. 종전에 없던 일이다. 심지어 여당인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새어 나오고 있다. 유승민·이준석·하태경·천하람·김웅 등등…. 이들은 분열이 패망으로 가는 길임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걸까.
며칠 전 모 신문의 기사에 달린 댓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광우병을 비롯하여 촛불과 오늘의 외교참사 운운하는 일체의 현상을 조금만 눈여겨보면 일종의 작전이요 전술임이 훤히 보인다. 이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인 것은 가자미 눈의 허약한 보수의 방관자적 정서 때문이다. 최소한 좌파는 상놈의 역동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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