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동쪽 자락에 ‘서출지(書出池)’가 있다. 소지왕의 사금갑(射琴匣) 설화에 등장하는 ‘글이 나왔다(書出)’는 연못이다. 현재 못은 남북길이 86m, 동서길이 50m의 장방형의 모습이다. 서쪽 못가에는 조선 헌종 때(서기 1664년)에 임적(任勣)이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 기와집 정자 ‘이요당(二樂堂)’이 있다. 이요는 ‘산수의 자연을 즐기고 좋아 한다’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뜻을 딴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금갑 설화
‘삼국유사’ <기이> 사금갑 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소지왕은 재위 10년(서기488년) 정월 보름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는데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 가라해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기사는 도중에 돼지 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렸다. 이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쓴 봉투를 주기에 받아 보니 겉봉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 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어 그 봉투를 소지왕에게 바쳤다.
소지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열어 보지 않으려 하자 일관(日官)이 아뢰길 “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 보셔야 합니다”고 말하자 소지왕이 봉투를 열어 보니 ‘금갑을 쏘아라(射琴匣)’고 쓰여 있었다. 이에 소지왕은 궁으로 돌아와 금갑을 쏘니 그 안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신라사초’의 사금갑 사건과 묘심의 옥사
‘신라사초’ 역시 사금갑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소지명왕기>이다. ‘10년(488년) 황룡 무진 정월,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니 못에서 ‘금갑을 쏘아라(射琴匣)‘라는 글이 나왔다. 이에 금갑을 쏘니 금갑 안에 숨어있는 사람이 쓰러져 죽었다. 간악한 행위의 진상을 살펴보니 묘심(妙心)의 모반이 드러나 염신(剡臣)에게 조사를 명했다. 묘심에게 사약을 내리고 란릉(蘭陵)과 영릉(英陵)은 출궁해 죄를 기다리라 명했다. 천궁(天宮·원군)과 지궁(地宮·선혜)을 폐하고 나가서 신궁(神宮)에 거주토록 명했다. 묘심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궁중의 많은 사람이 연루돼 상하 인심이 흉흉해 지도로(智度路·훗날 지증왕)가 이를 경계하고 염신이 막았다(王將幸天泉亭 有書出池 曰射琴匣 乃射琴匣有徒 隱內而斃 索其奸狀 謀出妙心 命剡臣按之 賜妙心死 命蘭陵英陵 出宮 待罪 命廢天宮地宮 出居神宮 時妙心獄事 多連宮中 上下洶洶 智度路戒 剡臣止之).’
‘신라사초’는 ‘삼국유사’의 사금갑 사건뿐 아니라 이후 사금갑 사건이 불러온 파장을 추가하고 있다. ‘묘심(妙心)의 옥사(獄事)’이다. 옥사는 반역, 살인 등의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일이다.
묘심은 누구일까? <소지명왕기>이다. ‘5년(483년) 수시 계해 4월, 묘심에게 아찬(6등급)의 작위를 내렸다. 묘심은 비태(比太)공의 침비(枕婢) 나연(那連)이 낳았다. 아버지는 비태공의 총신(寵臣) 삼고위(三高位)로 나연과 사통해 낳았다. 비태공이 가자(假子)로 삼았다. 장성하며 용모가 아름다우매 조생(鳥生)궁이 신기하게 여겨 폐신(嬖臣)으로 삼아 길렀다. 나연은 또 삼고위의 동생 집아(執兒)와 사통해 란릉(蘭陵)을 낳고 또한 비태공의 딸 영릉(英陵)을 낳았다. 란릉이 선혜(善兮)의 침비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고 또한 조생궁의 최고 총애를 받았다. 묘심이 순실(順實)랑의 무리에게서 도를 전수받고 능히 천선(天仙)에 접해 사람의 길흉화복을 안다고 스스로 말하니 사람들이 그의 말을 두려워했다. 조생궁이 궁중도인으로 삼으니 위엄과 명예가 나라 안팎에 가득해 삼궁(三宮) 모두가 사사로이 그를 섬기고 골녀들은 그 문하에 들어갔다(賜妙心爵阿飡 妙心者比太公枕婢那連生也 其父三高位以公寵臣私通而生 公以爲假子 及長 容皃絶美 鳥生宮見 而奇之 養爲嬖臣 那連又通 三高位弟執兒生蘭陵 又生公女英陵 蘭陵以善兮枕妃 受寵于王 妙心又被上寵鳥生宮 畏人有言 妙心受道于順實郞之徒 自言能接天仙問人禍福 鳥生宮以爲宮中道人 盛譽中外 三宮皆詣私之 骨女爭投其門).’
묘심은 비태(실성왕 아들·481년 사망)의 침비 나연과 총신 삼고위가 사통해 낳은 비태의 가자(가짜 아들)이다. 처음 조생(눌지왕 딸·지도로 어머니)의 눈에 들어 폐신이 되면서 왕실의 핵심에 진입하며, 어머니 나연이 낳은 이복 여동생 란릉과 영릉이 소지왕의 후궁이 되면서 점차로 왕실 내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묘심은 조생의 궁중도인(제사담당 선인)이 되며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능력을 발휘하며 소지왕의 왕후와 골녀의 섬김을 받았다.
그렇다면 묘심은 무슨 연유로 사금갑 사건을 일으켰을까? 사건발생 한 해 전인 487년 묘심은 소지왕의 제2왕후(地宮) 선혜(내숙의 딸)와 사통해 딸 오도(五道)를 낳는다(善兮生妙心女吾道于地宮). 묘심과 선혜의 관계가 도를 넘으면서 결국 두 사람은 신상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소지왕의 암살을 기도했다.
묘심의 옥사의 파장
묘심의 옥사로 인해 신라왕실은 일대 파란을 겪었다. 당사자인 묘심은 사약을 받았고, 소지왕의 후궁인 묘심의 이복 여동생 란릉과 영릉은 출궁당했다. 묘심과 사통한 소지왕의 제2왕후(地宮) 선혜는 폐위돼 내을신궁에 유폐됐고, 선혜의 아버지 내숙(乃宿·지도로 동복형)은 딸을 다스리지 못한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사임했다. 또한 묘심을 따랐던 소지왕의 제1왕후(天宮) 원군(園君·지도로 여동생) 역시 폐위됐다.(※ 묘심의 후원자 조생은 487년 사망)
묘심의 옥사는 묘심 자신과 관계된 인물(란릉·영릉)뿐만 아니라 상당수 지도로 계열이 왕실에서 퇴출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앞선 기록에서 ’지도로가 이를 경계하였다(智度路戒)‘는 의미는 바로 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지만 지도로는 소지왕과 새로운 타협점을 모색했다. 소지왕은 지도로의 딸 후황(厚凰)을 새로운 천궁(제1왕후)에 봉했다. 후황은 소지왕의 직계혈통인 아지(阿知·483년 병사)태자의 태자비이기도 한다. 결국 소지왕은 자신의 며느리를 왕후로 삼는 일종의 ‘딜(deal)’을 통해 지도로와 타협했다.
소지왕의 암살을 기도한 사금갑 사건은 묘심의 옥사로 이어지며 결과는 소지왕과 지도로(지증왕)의 정치적 타협으로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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