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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의 지구촌 IN & OUT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더라도 가치있는 일은 있다
대장동이다 대북 송금이다 정신없는 날들이지만
고개 들어 보면 해야 할 숭고한 일들이 차고 넘쳐
이혁재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2-23 11:15:00
▲ 이혁재 수석논설위원
 
 
튀르키예 지진을 보고 28년 전 일본 한신(阪神) 대지진 때 일이 생각났다.
 
28년 전 그때는 엄청 바빴었다. 일본에 특파원으로 가자마자여서 동서남북도 모를 때였는데 뻥 하고 신흥종교 ‘옴 진리교’ 사건이 터졌다. 서울에선 손님들이 사정없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터진 것이 한신 대지진이다.
 
지진 현장에 들어가는 데는, 평화로울 때면 15분 걸리지만 그땐 9시간 걸렸다. 죽을 뻔했다. 어마어마한 참사현장에 도착해 무너진 건물더미 앞에 앉아 숨 좀 돌리려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기사 안 보내고 뭐 하냐”는 것이었다. 너무 비참하고 너무 보도할 것들이 넘쳐나니까 오히려 뭘 보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무작정 걸었고, 골목에 쪼그려 앉아 우는 남자를 만났다. 왜 우느냐고 일본말로 물으니까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한국말로 대답했다.
 
“아내가 집 안에 있어요.”
 
골목길에 같이 쪼그려 앉아 무너진 집에 부인을 남기고 나와야 했던 남자의 얘기를 들었다. 그 남자는 6개월 전 오사카로 유학 온 충청도 출신 30대 후반의 학생이었다. 한국에서 이것저것 해도 잘 안 풀려 관광 쪽 일 좀 배워 보려고 유학 왔다고 했다. 유학생활이 6개월쯤 지나자 처가쪽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부인이 보고 싶어졌고, 혼자만 외국서 공부하는 것도 미안해 부인을 불렀다고 한다. 부인이 일본에 온 날 라멘 사 주고 사케 사 주고 오사카성 관광시켜 주고 하숙집에 돌아와 누웠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새벽에 지진이 났다. 집이 무너졌고 방에 있던 무거운 장롱이 부인을 덮쳤다. 부인을 구하려고 몇 시간째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데 부인이 말했다.
 
“여보 이젠 됐어요. 지쳤잖아요. 당신이라도 나가요. 그리고, 고마워요.”
 
어떤 튀르키예 사람이 건물 잔해에 깔렸을 때 “유언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사를 읽고 떠오른, 일본 지진 현장에 대한 기억의 단편이다. 세상의 비극 현장에서는 이렇게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비슷한 일은 또 있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진세(稅)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튀르키예는 1만7000여 명이 숨진 1999년 서북부 대지진 이후 지진세를 걷어 왔다. 지금까지 약 5조9000억 원이 걷혔다고 한다. 1999년부터 내진 설계를 강화하도록 건축 규정도 강화했다. 이번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중엔 규정이 강화된 이후 지어진 것이 상당수였다. 하지만 허망하게 무너졌다. 막대한 국민 혈세가 어디에 쓰였는지 아는 튀르키예 국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지진이 인재일 수 있다며 튀르키예 국민이 분개하는 이유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일본인은 침착하고 예의 바르고 시간 잘 지키고 확실하고 등등 원리·원칙대로 사는 사람들이란 신화가 흔들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진이 나서 건물이 뒤집어지자 곳곳에서 부실공사 현장이 드러났다. 당시 허가를 해 준 공무원이 누구고, 건설업자는 누구였냐는 기사가 한동안 나왔었다. 그 기사들을 보며 일본도 사람 사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반면 세상은 꼭 같지는 않다는 사실도 참극을 통해 드러난다. 튀르키예 지진을 보며 느낀 것들에 개인차는 있겠지만 필자는 “내 동생을 구해 주시면 평생 노예가 될게요”라고 호소했던 한 튀르키예 소녀의 사연이 가장 가슴 아팠다. 어린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가족을 지키려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일본에선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이재민이 수용된 체육관에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었다. 그는 연로한 부모를 발견하곤 절하며 눈물 흘렸다. 메고 온 가방에서 사과와 음료수를 꺼내 대접했다. 그러고는 다시 절을 하고 손 흔들며 가 버렸다. 이해가 안 됐다. 나 같으면 당장 집으로 모시고 갈 텐데…. 나중에 일본사람한테 당시 일을 물어보니 “왜 집으로 모시고 가지요?”라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세상의 참사 현장에는 이렇게 같은 점도, 다른 모습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대참사를 통해 봤던 장면 중 우리 눈에 계속 담아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기부 행렬에 동참하는 우리 국민의 모습을 잊지 말자. 둘째 경제 규모 10위권 내인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잊지 말자. 셋째 그건 인색해서가 아니라 인도주의적 지원 경험이 적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위로하는 사람 모습도 잊지 말자.
 
혼탁한 대한민국에서 이런 순수한 마음들이 넘쳐나 앞으로도 꺼져 가는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길 기원한다. 정치 광풍에만 휘몰려 있지 말고, 어려운 사람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지원과 국민의 관심이 지속되길 기원한다. 긴급구호대 2진 전원의 무사 귀환을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대장동이다, 대북 송금이다 어지러운 국내 상황에서 눈을 들어 밖을 바라보면 시급한 일, 가치있는 일 등 세상엔 이렇게도 할 일이 많다. 그런 숭고하고도 제대로 된 일들을 하느라 정신없이 보람찬 나날이 지속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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