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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생활명상 즐기기
평화로운 마음을 벗어난 원인은 집착이다
분노·우울·좌절·슬픔·근심이 있을 때 봐야 할 것
김성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5-19 10:00:38
 
▲ 김성수 작가·마음과학연구소 대표
부부가 이혼을 했다. 남편이 후배여서 나는 그를 잘 안다는 생각이 있다. 그의 청춘기 꿈이 무엇인지 알 정도면 ‘잘 아는 후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후배의 꿈은 ‘화목한 가정’이었다. 걸핏하면 호연지기 운운하면서 살아야 청춘 취급을 해 주던 당시로서는 노골적인 놀림감이 될 만한 꿈이었지만 그는 진지했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혼 소식을 접한 내 생각은 그 지점에서 멈췄다. 이 친구 혹시 ‘화목한 가정’을 너무 힘차게 붙들어 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집착(執捉)은 ‘마음으로 뭔가를 붙들고 있음’을 나타내는 데 흔히 쓰는 한자말이다. 젖먹이 아이가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거나 쫓아오는 적군을 피해 죽을 힘을 다해서 달리는 군인의 모습도 생존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집착은 스스로 정당하다. 젖먹이가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이나 적군을 피하는 도망자, 그 어디에서 부당함이 엿보이는가. 스스로 정당한 것을 붙들고 있는데 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당신은 대체로 ‘마음으로 뭔가를 붙들었을 때’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기억도 많다. 그런 기억은 생존이나 성취·인간관계 등 삶의 전반에 펼쳐져 있을 수 있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기억’은 곧 새로운 결과를 향해 집중하는 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삶을 시작하는 시점부터 집착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몸짓이 있다. 갓 태어난 젖먹이의 꼬옥 그러쥔 손이 그것이다. 아이의 손은 그 어떤 힘으로도 풀 수가 없다. 손바닥을 억지로 펼쳐 놓으면 이내 다시 말아 쥔다. 거기에 무슨 정당성이니 부당함 같은 게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미의 손가락이나 젖병 따위를 붙드는 연습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안으로 돌리는 사람, 밖으로 보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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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이라는 어휘에서는 ‘앞뒤 안 가리고 붙들어 매는 행위’의 기세가 느껴진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쥐었던 손가락을 편다. 만약 아이가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록 손을 펼치지 못하면, 병이다. 스스로 정당한 것, 탄생 이전부터 선험적으로 쥐어 잡은 것도 언젠가는 풀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이는 집착한 적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화목한 가정’ 보다 더 아름다운 가치는 드물 것이다. 그런 가정을 삶의 이상으로 삼아 결혼하고, 자녀 낳고, 잘 기르는 일을 해내는 가정이라면 ‘화목한 가정’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왜? 삶의 이상을 ‘화목한 가정’에 두고 살았던 후배는 스스로 선언한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까.
 
세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안다 해도 알아지지 않는 것이, 사실은 당사자인 부부 자신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상황·조건은 일종의 실루엣 같은 것임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알게 된다. 문제의 핵심이었던 일이 이제 돌아보니 껍데기도 아니었더라.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때 그때 작용했던 ‘집착’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을 뿐.
 
만약 후배의 마음 속에서 ‘화목한 가정’이라는 필생의 구호가 조금씩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왁자지껄한 가정’ ‘각자도생 가정’ ‘가끔 보는 가정’ ‘소리 없는 가정’…. 가정의 실제적 내용이 담긴 구호로 갈아 끼우면서 세월과 함께 흘렀더라면?
 
‘집착’이라는 마음의 성품은 ‘마음의 대상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붙들어 매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어지간해선 그 몰골을 드러내지 않는다. 집착은 대체로 홀연하다. 내가 왜 그 가치를 붙들고 있는지, 내가 무슨 이유로 그런 주장을 거듭하는지, 스스로 정당하고 스스로 정답이므로 안으로는 악을 쓸지언정 밖으로는 태연하려고 애를 쓴다. 스스로 정당하고 스스로 정답이라는 확고함 속에 이미 비극이 싹트고 있음을 인정할 만한 구조가 아니니, 그 정당성과 정답을 인정해 주지 않는 모든 존재들에 대해 분노와 울분과 섭섭함이 차오를 수밖에 없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루 중 수없이 출몰하는 내면의 분노·슬픔·두려움·좌절·우울 따위에 노출됐을 때 마음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과 자신 밖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있는 ‘가치·신념·기억·관념·결의’ 등의 족쇄의 열쇠를 찾아낸 사람이다. 마음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탓하고, 화내고, 우울해 하고, 좌절하고, 두려워하는 것밖에 없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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