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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 ‘숲의 기원’展에서 만난 두 종이작가 서정민·위영혜
피서도 하고 예술 향유도 할 수 있는 ‘숲의 기원’전(서호미술관)
서정민, 무한대 종이띠 접착해 만든 마술 같은 화면
위영혜, 해체된 지편을 심미적 질서와 리듬으로 조율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7-21 06:31:30
 
▲ 이재언 미술평론가
북한강변에 자리잡은 서호미술관에서 ‘숲의 기원’이라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어 들렀다. 더위도 식힐 겸, 산수(汕水·정약용이 북한강을 부른 이름) 주변 풍광도 즐길 겸 들른 것이다. 더위도 피하고 전시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렇지 않아도 서호미술관은 전에 열수(洌水·말년에 정약용이 즐겨 쓴 호) 정약용의 ‘산수심원기’를 주제로 대규모 미술기획전을 열었던 곳이다. 숲의 기원을 탐구하기보다는 숲을 해석하는 전시로, 개성이 뚜렷한 4인 작가의 숲에 대한 해석이 여름 전시로 제격이다. 서정민·위영혜·전인수·송승림 4인의 작업을 묶어 특징을 말하기는 쉽지 않으나 확실한 것은 4인의 작가 모두 숲의 본질이 단순히 이미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생명의 근원과 맞닿아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작가들이 사용하는 질료(종이·옻·섬유 등)의 근원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종이를 사용하는 두 작가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다른 두 작가에 대해서도 언제고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 북한강변에 자리 잡은 서호미술관 본관과 한옥 별관.
 
서정민 작가의 종이작업 
 
작가의 조형은 면이라는 본질을 구체적 현상으로 구현해 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수만 겹 접지(接紙)로 만들어진 면(판) 위에 조각도로 조각을 한다는 설명을 전시장에서 들은 바 있지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작업실 방문을 자청했다. 실제 전시현장에서 들은 그대로, 테이프 같이 긴 종이띠를 계속 감아 나가면서 접착시켜 거대한 면(판)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해가 될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테이프 단면을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만,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 서정민, 선36, 한지, 180x180cm, 2022.
  
제작 과정 자체가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요하는 노동집약적인 것이지만, 작가가 추구하는 미의식을 담을 수 있는 최적의 양식으로 보인다. 무한으로 연결된 시간과 공간의 본질,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면서 유전하는 세계상, 생명의 유구하고도 무궁한 이어짐… 등의 컨셉트에서는 불가나 도가의 세계관과 핵심이 그대로 묻어 난다.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 전통 고서와 같이 글이 인쇄된 종이의 측단면이 표면을 이루게 된다. 이 또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수많은 담론과 지혜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는 정신의 초월적인 국면을 상징하면서도, 뭇 인간의 지혜 혹은 담론들에 대한 냉소가 담긴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글이 담긴 종이의 단면들이 집적되면서 나이테 같은 추상적인 패턴들과 결(texture)·부조적인 효과 등이 다양하게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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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만 겹의 종이로 만들어진 판에 조각도로 선작업을 하는 서정민 작가
그런가 하면 한두 치 정도 폭의 종이들을 겹겹이 감아 짧은 막대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는데, 이 역시 종이에 담긴 글씨들의 단면이 옅게 표면에 드러난다. 거대한 화면에 이 종이막대들을 직각으로 혹은 비스듬히 끝없이 붙여 나가는 작업의 경우 완전한 부조의 양식을 띤다. 하나의 막대 안에 다양한 문자의 파편들이 혼재되고 있는데, 그것들이 다시 전체적으로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어 거리와 방향 등에 따라 작품의 구성과 효과가 변화무쌍한 시각의 세계를 연출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빈 종이들로 이루어진 판의 경우, 면을 평탄하게 고르고 조각도로 조각을 한다. 마치 목판에 조각도로 음각의 선들을 파 나가듯 유유자적, 자유롭게 낙서를 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면들이 겹쳐 완벽한 두께를 가진 판 혹은 덩어리가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들 앞에서 문득 드는 생각은 우리에게 우연적으로 혹은 사소해 보이는 사물이나 사건도 그 이면에 무수한 존재와 사건들의 연과 연이 얽혀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독특한 종이작업은 국내 무대도 그렇지만 특히 외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우리 고유의 미의식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 방법과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작업이기에 더 값지다. 작가의 수많은 작품 자료들에 비해 수장고에 의외로 작품이 없다. 대부분 외국으로 나간 작품들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란다.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 서정민, 무심, 서책 한지, 200x200cm, 2022.
 
▲ 서정민, 선39, 140x140cm, 2022.
 
위영혜의 종이작업
 
전자의 종이작업이 구축적인 데 비해, 위영혜 작가의 종이작업은 다분히 해체와 고전을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고전이 된 20세기 초 큐비스트들의 양식인 파피에콜레(papier collé)를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종이를 각양의 지편(紙片)으로 찢어 냈다는 것은 해체적인 양식이지만, 또한 고전적일 수 있는 것은 다시금 무언가 수습해 나가면서 질서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기존의 회화 질서와 시각적 질서를 허무는 해체의 단초로서 파피에콜레가 참고되고 있지만, 작가의 화면은 여러 파편들을 회화적으로 조율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 고유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위영혜, 절실한 만남 2, 캔버스에 혼합 매체, 72.7x60x6cm, 2018.
 
▲ 위영혜, 절실한 만남 4, 캔버스에 혼합 매체, 72.7x60x6cm, 2018.
 
종이가 각양의 지편(紙片)들로 찢겨 카오스 상태로 떠도는 것들은 오늘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로 해석될 수 있다. 지편 개체들의 조합은 숲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혹은 우주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작가의 화면들이 더러는 숲처럼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식물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추상적 기조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지는 않다. 세계를 지탱시켜 가던 보편적 원리나 통일성의 가치들이 부정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 만큼은 명료해 보인다. 이미 객관적으로 경험되고 있는 현실, 바로 그것에 대한 작가의 이상은 분열된 개체들을 모자이크로 재구성하듯 서로가 당기는 어떤 동기들을 주체적으로 부여하고 나선 것이다.
 
▲ 위영혜, 절실한 만남 4, 캔버스에 혼합 매체, 72.7x60x6cm, 2018.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인 찢김은 어떤 의지로도 제어되지 않는 카오스로서 오늘의 세계상 그 자체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파편들을 수습하여 일종의 코스모스 상태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지편들마다 무수한 드로잉과 채색을 통해 면마다 변화들이 주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이제 단순히 어떤 공간 위에 던져진 것일 수 있지만, 모종의 시각적 중력과 인력을 띠게 된다. 이로써 각 파편 개체들은 서로를 당기며 질서를 유지하는 코스모스를 이루게 된다. 이 대목에서 뵐플린이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대비시켜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으로 설명한 바를 참조해 볼 수 있겠다. 지편 개체들이 여러 층으로 중첩되면서도 윤곽이 선명한 것은 선적인 것이며, 여기에 모종의 드로잉과 채색 농담을 부여하는 것은 회화적 장치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위영혜, 절실한 만남 5, 캔버스에 혼합 매체, 129.8x161.7cm, 2023.
  
작가의 ‘절실한 만남’이라는 명제에서 알 수 있듯이 개체들 간의 랑데부가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우연적인 조합으로 보일지라도, 작가는 그 어떤 만남도 우연적인 것은 없다는 입장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질서의 구심점이나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고 있어 그것은 질서의 세계가 되는데, 리듬을 띤 추상의 질서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숲으로도 혹은 꽃다발로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원성으로 여러 갈래가 된 개체들을 다시 통일적 질서로 각색해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심미적인 모티브들과 가능성을 시원하게 방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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