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긴요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성 친구이거나 특별히 각별한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일단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즐겁다. 서로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까스로 이어가는 대화도 아니다. 그런데 뭘까? 이런 기분 아는가. 뭔가 둘이 마주보고 리듬을 타면서 가볍게 스탭을 밟는 듯한 기분.
대화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다. 물론 혼잣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또한 마음 속 상대가 있다. 유난히 대화가 잘되고, 다음에 다시 만나고 싶은 경우를 되돌아보자. 그것이 단 두 사람 간의 대화든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나 좌담을 하는 경우든 상관없다. 돌이켜보면 그와의 대화 시간은 일종의 블루스나 지르박 같은 가벼운 춤을 추는 느낌이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 척추를 곧게 펴고 상대의 날숨이 끝나는 지점에서 얼굴을 미세하게 엇갈린 채 리드미컬하게 흐름을 이어가는 장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청자와 화자의 리드미컬한 대화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은 ‘상대의 말에서 모순을 느낄 때 어떤 내부 기준이 작동하는지 연구’한 결과 화자의 태도나 목소리에 비해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연구에 따르면 ‘표정이나 태도의 비중이 55%, 말투나 억양의 비중 38%, 실제적 메시지의 비중 7%’로 나타난다. 이 내용은 대화에 대한 일반 관념을 전복시킨 연구로 널리 알려졌다. 소위 스피치 업계를 중심으로 ‘언어 사업’에 획기적 시사점을 던져 준 것이다.
하지만 메라비언의 법칙에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연구의 대전제 중 하나인 ‘상대의 말에서 모순을 느낄 때’라는 단서이다. 가령 ‘그만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상대의 태도나 말·표정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깔깔대면서 ‘그만해! 그만해!’라고 한다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상대에게 ‘더 해 봐!’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메라비언은 이와 같이 말의 내용과 태도가 모순된 경우, 표정이나 태도의 값이 월등히 더 큰 비중(55%)을 차지한다고 한 것이다. 일반적인 대화 상황을 일컫는 것이 아니었다.
‘대화의 춤’을 여는 서막은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라비언의 연구는 대화 국면에서 몸짓 언어와 말투가 ‘좋은 대화’를 이끌어가는 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수치화함으로써 학계와 산업계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내용 중심’의 대화에서 몸짓·표정·음성 중심의 대화로 전환되는 시대가 열리게 한 것이다.
춤 같은 대화를 할 것인지, 결투 같은 대화를 할 것인지는 대화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누가 삭막한 대화, 돌아서면 씁쓸한 대화를 나누기 바랄 것인가. 이왕이면 사람 간에 아름다운 춤을 추듯, 때로는 나의 에너지를 다 쏟기도 하고 때로는 온전히 내맡기면서 교류하는 대화를 하고 싶을 것이다. 모든 춤이 그렇듯 대화 또한 마찬가지다.
대화의 기술은 곧 삶의 기술이다. 누구나 대화 없이 살아가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대화의 대전제를 ‘평화와 삶’이라고 하는 마셜 B. 로젠버그는 저서 ‘비폭력대화’를 통해 삶을 소외시키는 대화의 유형으로 맨 먼저 ‘도덕주의적 판단’을 꼽았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판단에 대해 ‘나쁘거나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기적이야.’ ‘그 사람들은 편파적이야’ ‘그건 당치도 않아’ 라는 표현과 ‘내 생각은 당신과 좀 달라’ ‘그 사람들 입장도 있겠지’ ‘우리가 아직 모르는 사실이 있나 보다’의 차이가 보이는가.
‘대화의 춤’을 추게 되는 서막은 무엇일까. 당연히 상대에 대한 ‘공감’이다. 마음의 공감도 중요하지만 몸짓의 공감이 직관적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미소 짓기·자신의 두 손을 마주 잡는 일·양팔 벌리기 등의 몸짓은 말 없는 말로써 즉각적인 효과를 얻는다. 대화의 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라. 아무런 대가나 바람도 없이 단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틀림없이 ‘대화의 춤’을 멋지게 연출하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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