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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 최홍원, 그를 보면 우리 미술의 뿌리가 보인다
‘우리의 뿌리’가 담긴 7800점의 방대한 작품 세계의 거장
‘힘’과 ‘흥’ 상상력으로 충만한 우리 미술의 증거자
단테 ‘신곡’의 감동 그린 50년대 펜화 100점 보존 관리 시급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8-04 06:31:10
▲ 이재언 미술평론가
과거 우리 현대미술이 서구 추종에 여념이 없어 무언가 왜곡이 많았던 때, 우리가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들이 참 많았다. 요즘 a문화 컨텐츠란 말을 많이 쓰는데 우리의 뿌리에 입각한 바로 그 컨텐츠들을 우리 문화 시스템 속에서 유기적으로 피드백하지 못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급팽창 중인 우리 미술시장에선 의외로 작가의 빈곤을 통감하며 뉴페이스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두루 좋은 작가들이 발탁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유감인 것은 우리 현대미술사 속에서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자기 주도적으로 화업을 이룬 작가들에 대한 조명이 없이 너무 건너뛰기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우리의 문화 시스템이 지나치게 서울 중심으로만 작동되었던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었던 작가들을 찾아 우리 미술사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우리 현대미술이 뿌리를 잊은 서구 추종 일변도의 것만이 아니었음을 자각하고 미술사 다시쓰기를 해야 한다.  
 
▲ 단테의 신곡1, 펜화, 2절지, 1950년대 말 추정.
 
이러한 당면 과제 앞에서 필자가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작가는 고(故) 최홍원 작가(1929-2011)다. 그는 정주 태생으로 오산학교와 평양 미대를 졸업 후 월남, 주로 강원도에 정착하여 평생 동안 남아 있는 자료만 해도 7800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화업을 이루었다. 강원 지역 외 서울에서 몇 차례 전시나 아트페어 참가 기록은 있지만 상업적인 환경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인이 남긴 작품과 자료들이 우리 미술사에 소중한 것들이지만, 너무도 방대하여 아직 정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지역사회에서도 작가 사후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그 위상을 강원도로 국한시킬 수 없는 거장인 것을 깨닫고 여러 가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 여건에서 작가의 위업이 제대로 조명될 수 있을 리 없다. 
 
▲ 최홍원 작가 생전의 모습.
유족과 제자들로부터 건네받은 자료집(7800점의 이미지만 수록된)을 수일간 살펴보고 적지 않게 흥분이 됐다. 고인의 화명을 일찍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작업의 양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의 수준과 작가로서의 자세 등의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풍경·인물·동물(새), 기타 다양한 소재의 그림들이 기본적으로 우리의 상고시대로부터 형성된 미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반갑다. 재현성·표현성·초현실성 등을 넘나드는 개성적이고 진지한 표현의 세계 그 모두가 독립 미술관을 채우고도 남을 매머드 컨텐츠다. 
 
최홍원 작가는 주로 유화와 펜화·드로잉 등을 고루 남겼는데, 특히 펜화나 드로잉 같은 작업들이 작가의 탄탄한 역량과 감각이 잘 드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유화 못지않은 완성도와 가치를 가진 장르로 승화돼 있다. 물론 작가가 생전에 크고 작은 전시들에 초대된 바 있지만 주로 유화 위주로 발표를 했던 터라 주옥같은 드로잉들이 빛을 많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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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테의 신곡2 펜화, 2절지, 1950년대 말 추정.
 
특히 필자를 흥분시킨 것은 ‘단테의 신곡’이라는 펜화 연작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사이 비교적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단테의 ‘신곡’을 완독, 도합 100점에 이르는 연작 시리즈를 통해 편마다 그 감동들을 2절지 사이즈의 종이에 펜화로 표현한 것이다. 펜화의 표현과 완성도가 놀랍다. 고전을 완독하여 그 감동을 오랜 세월에 걸쳐 화폭에 담아낸 시간과 작품의 양도 대단하지만, 한 점 한 점에서 드러나는 표현의 기량과 감각에 대해선 그 어떤 찬사를 해도 부족할 것이다. 
 
이 연작은 주석 삽화 102점을 그린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위업에 견줄 만하다. 삽화와 다른 점을 꼽자면 작가의 화면에는 현대적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하는 등 자율성과 완성도 면에서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는 시공을 초월한 신화적 알레고리의 깊이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연구의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 염, 72x60cm, 유화, 1988.
 
▲ 도롱뇽, 72x60cm, 유화. 1989.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세기도 더 된 이 작품들은 산화 변색과 부식이 진행되고 있어 시급히 전문기관으로부터 보존 관리를 받아야 하는 상태다. 게다가 작품마다 있어야 할 설명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림들마다 해당 텍스트가 링크되어야 작품의 가치는 물론 향유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이 걸작들을 사장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전담 학예사가 실제 ‘신곡’을 독파한 후, 문학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텍스트와 연결시키고 해석하는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지역의 빈약한 문화 인프라의 수준을 감안할 때 전문 인력이 좀 더 잘 갖추어진 미술관들에서 나서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독실한 불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불교적·무속적 소재나 주제의 작업을 적지 않게 한 바 있다. 하지만 작가는 종교를 떠나 보편적인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진지하게 그림에 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범 종교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자신의 신앙과는 무관한 종교의 색채를 띤 단테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을 보면 불교에 대해서도 얼마나 깊이 있게 섭렵했을지 짐작이 간다. 마르크 샤갈이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바이블을 탐독했고, 성서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그토록 많이 제작했던 것과 비견된다.  
 
▲ 새, 116x91cm, 유화, 1994.
 
▲ 새, 116x91cm, 유화, 1995.
 
작가는 오랜 작업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과 내면을 표출시키는, 충동으로 가득한 화면을 정착시켜 왔다. 펜화나 드로잉에서는 대단히 섬세한 표현을 하고 있지만 유화의 경우에는 필치나 색상에서 강렬함이 묻어난다. 또한 양식적으로 표현주의적·초현실주의적·팝아트적 형식들을 차용하고 있지만, 자신만의 미의식과 표현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다. 드로잉과 유화를 통틀어 그가 가장 비중 있게 등장시킨 소재가 ‘새’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새 들은 대체로 긴 목들이 몸통으로 순환되는 듯한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선 윤회와 같은 모티브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공포 상황을 겪으면서 생긴 내면의 깊은 상처를 씻어 내기 위한 작가 스스로의 처방은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동시에 새의 형상은 뭔가 북방민들의 신화와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심미적 정체성을 소환하는 데서 등장하는 삼족오의 이미지들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음악. 60X120cm, 유화, 1997.
 
회고하건대 지난 20세기 후반 우리의 현대미술은 모델을 서구 일변도로만 지향하던 때가 있었다. 서구 추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홍원은 그 존재 자체로서 추종에서 벗어나 우리 미술의 뿌리와 자주성을 견지하려 했던 것이며, 이것은 미술사에서 이제라도 귀감으로 삼아야 할 팩트이다. 우리는 첨예한 이슈에서 벗어나 홀로 화업을 일군 작가들을 외면했던 지난 과거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미술은 본래가 에너지와 흥이 넘치는 것이었다. 동북아에서 유독 특이하게도 호방하고 신명이 넘치는 미의식을 지닌 공동체로서의 본질이 지난 세기의 현대미술에서는 원활히 반영되지 못했다. 이제는 이러한 상상력과 개성적 표현의 역량으로 우리 미술의 건강한 위상을 높일 작가들을 찾아 복권시켜야 한다. 최홍원, 그의 빛나는 방대한 작품 세계가 하루속히 우리 대중의 품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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