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운동의 1960년대는 북한과 연계하여 지하활동을 전개하며 세력 확산을 기한 시기이다. 당시는 6·25 남침 전쟁의 역작용으로 숨을 죽이며 지하에 잠복해 있던 좌익 세력과 1950년대 말 재발아한 학원가의 좌익 의식화 세력 등이 합류하여 지하활동으로 좌익운동의 맥을 이어온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정교한 대남공작 결과 통혁당(통일혁명당) 등 지하당이 구축되어 북한과 연계하여 활동했다.
특히 1961년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및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1964년 인혁당(인민혁명당), 1967년 동백림 간첩단, 1968년 통혁당(통일혁명당), 1969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등에서 보듯이 이 시기 좌익 세력이 완전히 발아했다.
이 중 인혁당사건과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재심 결과 일부 관련자들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당시 수사기관이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가혹행위를 했다는 것이지, 북한과 연계된 활동의 사실 관계를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 이승만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 혁명으로 일시적으로 치안 상태가 악화되고 반공 체제의 이완 현상이 조성되었다. 그 결과 6·25 남침 전쟁 후 장기간 잠복해 오던 좌익 세력이 ‘혁신계’라는 명분으로 각 분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1961년 민자통 주도하에 민족통일 논의가 활성화되면서 친북 의식화된 일부 좌익 세력 주도로 통일운동이 격렬히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좌익 세력은 1961년 5월 서울대에서 민통련을 결성하고 북한 학생들에게 남북 학생회담을 제의하며 통일 투쟁을 전개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민통련의 핵심 세력은 1950년대 말 결성된 서울대 이념 서클인 ‘신진회’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강력한 반공 정책으로 그동안 발호했던 좌익 세력은 다시 지하화되며 학원가에서 의식화 확산을 기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좌익 세력은 각 대학 학생회를 장악하여 각종 투쟁을 은밀히 배후 조정하게 된다. 이들은 1963년 서울대에 민비련(민족주의비교연구회)이라는 이념 서클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
민비련의 조직 실체는 1967년 검거된 동백림 간첩단을 통해 북한과의 연계성이 밝혀졌다. 또한 같은 해 민비련과는 별도의 좌익 서클인 ‘불꽃회’의 실체도 드러났다. 불꽃회는 강령에서 한국 사회를 미제의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혁명의 성격을 사회주의혁명의 전단계인 민족해방·조국통일·민주주의혁명으로 설정하는 등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혁명론을 전개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은 남한 혁명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1960년대 초부터 지하당 구축 작업에 주력하는데, 이의 성과물이 바로 인혁당과 통혁당이다. 1968년 7월 발표된 통혁당 사건은 검거자만 해도 149명에 이르는 대규모 지하당 사건이었다.
김일성은 1961년 제4차 당대회 때 남한의 4·19 혁명을 공산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한 근본 요인이 남한 내 혁명을 지도할 ‘혁명적 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남한 내 혁명당(지하당) 구축을 강조하는 교시를 하달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대남공작 지도부(당 대남총국)는 1963년 4월 간첩 김수영·김송무를 남파해 이른바 연고선(緣故線) 공작을 통해 포섭한 최영도를 중심으로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을 포섭하여 남한 내에 새로운 형태의 독자적인 혁명당을 결성했다.
김종태 일당은 1964년 3월15일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암약해 왔다. 김종태는 1968년 당국에 검거되어 조직이 와해될 때까지 4회에 걸쳐 밀입북해밀봉교육을 받았으며 통혁당 창당에 필요한 공작 지령 및 거액의 공작 자금을 수령했다.
이들은 지하당의 공개 외곽 조직인 인전대(引佺帶·당과 대중을 연결) 형식의 합법적인 대중 서클 조직을 결성했다. 이들은 서울대 문리대 출신들로 구성된 ‘1960년대 학사회’, 통일전선체 성격의 ‘민족해방전선’ ‘조국해방전선’ ‘새문화연구회’(월간 청맥 발간)·청맥회·청년문학작가협의회·민족주의연구회· 기독교청년경제복지회 등을 결성하고 활동해 왔다.
통혁당 사건은 1950년대 잠복했던 국내 좌익 세력이 꾸준히 그 세력을 확장해 북한과의 연계 하에 적화 혁명 노선에 따라 지하에서 활동해 온 사실을 입증 해 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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