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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 신체와 그림이 만났을 때의 ‘기운생동’
한국화가로서의 모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고뇌해 온 안영나 작가
바디페인팅을 화면에 접목, 그것에 예술적 깊이를 부여
무위와 중도의 상징 ‘꽃 아닌 꽃’ 연작으로 한국화의 새 장을 열어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15 06:31:10
▲ 이재언 미술평론가
‘우물은 하나만 파서는 안 된다. 할 수만 있다면 여러 곳을 파야 한다’는 이어령의 말을 인생의 모토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강단에서 학생들 가르칠 때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 볼 것을 강조한 바 있다. 필자도 실기를 했다가 이론으로 방향을 바꾼 케이스로, 그림보다는 글쓰기나 큐레이팅 등에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권하곤 했다. 
 
그 결과 현재 현장에서 동료로 활동하는 제자가 많아지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시도도 젊었을 때, 즉 인생의 탐색기에나 전적으로 맞는 말인 것 같다. 이미 자기 세계와 양식이 확고해진 기성 작가들에게는 이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주변에 새로운 시도를 갈망하여 다양한 양식을 섭렵했지만 오히려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생애를 마친 경우를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으니 말이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 Flower No Flower-믿음, 한지 먹 채색, 165x260cm, 2018.
 
며칠 전 있었던 ‘2023 키아프·프리즈’ 관람 중 반가운 작가를 만났다. 엄청난 인파에 떠밀리며 관람하는 중에도 눈에 띄는 그림이 있었다. 바로 한국화 중진 안영나 서원대 교수의 작품이었다. 활력이 넘치는 필력과 대범한 색채, 특히 울트라마린의 몽환적 분위기가 특징인 그의 그림을 몇 년 만에 만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통화를 해 보니 그는 몇 년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새로운 시도라는 것이 궁금해 따로 자리를 갖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바디페인팅 콜라보, 2016.
 
그의 새로운 시도란 퍼포먼스와 바디페인팅을 기존의 그림들에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수묵채색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가가 다소 낯선 ‘바디페인팅’이라 하니 뭔가 생뚱한 조합 같았다. 하지만 받은 아카이브 자료들을 보니 기존의 그림들과 시너지를 일으켜 기운생동 혹은 엘랑비탈(élan vital)의 미의식이 더 입체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의 신체를 매개로 혹은 자신의 활력 넘치는 화면과의 협업을 통해 기운생동의 가치가 단순히 화면 형식에 머물지 않고 관객의 내면에 강렬한 충격파를 던지는 역동적 양식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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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도는 파격이라면 파격이다. 한국화 화단의 다분히 보수적이고 현학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어찌 보면 뷰티 분야에서 이벤트처럼 시도되고 있었던 것을 과감하게 자신의 화면 혹은 컨텍스트로 끌어들여 접목시킨 것이다. 
 
▲ 바디페인팅 콜라보, 2016.
  
물론 바디페인팅은 거슬러 올라가면 원시시대부터 다양한 목적으로 수행되곤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화장과 의상으로 분화되고 양상이야 많이 달라졌다지만 안영나 작가의 경우 제의나 종족 정체성·신분 등의 다양한 사회적 코드와 동기들이 적용되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자신의 컨텍스트 안으로 인입시키고 있다. 궁극적으로 전자에는 보다 깊이 있는 파인아트의 옷을 입히고 또한 자신의 화면에는 더욱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으로 일석이조가 된다. 21세기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에 따르는 통섭의 시대, 퓨전의 시대라지만 창신(創新)에 다소 소극적인 한국 화단에 긍정적 자극제와 활력소가 될 것이라 예상된다. 
 
▲ Flower No Flower-新일월오봉도, 60x240cm, 2018.
 
▲ Flower No Flower-자연1, 한지 먹 채색, 39X69cm, 2021.
 
작가의 입장에서야말로 온고지신(溫故知新) 혹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모토가 한국화가이자 또한 교수로서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논어’ 위정편의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될 것이다’(溫故而知新이면 可以爲師矣)는 말은 후학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었던 터이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을 앞둔 시점이라면 회화 자체가 완성도 높은 정점에 있는 때로서, 매우 조심스러운 시도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체와 자신의 그림이 결합하여 자아내는 심미적 시너지는 미처 예상치 못한 성과였던 것 같다. 이러한 신선한 시도가 젊은 무명작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려니 하면서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화단의 중진, 그것도 엘리트 코스를 줄곧 밟아 온 영향력 있는 작가가 시도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 Flower No Flower, 한지 먹 채색, 170X261cm, 2022.
 
▲ 키아프 부스 모습, 2023. 9. 7 - 10, 코엑스(조선화랑).
 
작가는 오랫동안 ‘꽃 아닌 꽃’ 연작 작업을 해 왔다. 논리적으로 모순율에 저촉되는 명제로서 동서고금의 철학 어디에서도 배척되는 명제를 작업의 키워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이해를 구하자면 양자물리학에서나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닐 수 없다. ‘0’이거나 ‘1’이어야 하는 조건에서 벗어나 ‘0’과 ‘1’을 종횡으로 누비는 패러다임에서나 공감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닐까. 그것은 예술의 본질이며 또한 자기 그림의 속성이기도 하다. 다분히 노장(老莊) 철학에 기반한 자기성찰을 그림에 적용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냥 무작위의 드리핑으로 떨어뜨린 안료 방울들이 꽃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또한 분명히 꽃 형상을 한 이미지가 무릇 단순한 선(線)과 안료의 층으로 차갑게 환원되는 바로 그 경계 지점이 바로 ‘꽃 아닌 꽃’이다. 일견 관념의 유희 같지만 화가들이 보통 미학적으로 고심하고 있는 확장성과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 안영나 작가
현대 회화에선 무의식적 혹은 자동기술적 필치라고도 말하지만 작가의 무위와 무욕의 그림은 어떤 면에서 중도 혹은 양가적(兩價的)인 세계이다. 꽃이 아니면서 꽃이 되는, 그리고 비구상이면서도 재현이 되며 자연이 아니면서도 자연이 되고 아울러 관객의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또한 적절한 거리두기를 동시에 요구하는 경계 지점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가 도처에서 기존의 카테고리를 허무는 초유의 변혁을 목격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회화의 가능성을 위해 나름 짜낸 고육책일 수도 있다. 시장에서 인기가 있는 작가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몸부림 같은 몸짓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이 살짝 엿보인다. ‘급변하는 세계 앞에서 그림의 본질과 가치는 무엇일까.’ 그가 작가로서 성찰하고 고뇌하는 이유이며 법고창신을 지속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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