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은 “공영방송의 공적 책임을 구현하기 위해 이사회를 각 분야 전문가와 분야의 대표성을 반영해 확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얼핏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제고하고, 정치·사회·문화적 다양성을 구현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공영방송 거버넌스의 ‘외적 다원성(external plurality)’은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내적 다양성(internal diversity)’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공영방송이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보 세력의 정치 세력화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노조가 구성원 다수와 조직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이 추진하는 법안대로 공영방송 이사회가 구성된다면, 언론노조와 동일한 성향의 이사회와 공영방송 내부 구성원이 공존하면서 감시·규제 기능이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내적 다양성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추천 단체와 이사 수를 늘려도 같은 성향의 인사들로 구성된 공영방송 이사회는 ‘허구적 다양성’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의 방송평의회처럼 다양한 영역을 대표할 수 있도록 이사와 추천 단체 수를 늘리는 방법이 있다. 실제로 야당과 일부 학자들은 야당 방송법안이 독일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독일 ZDF 방송평의회 위원은 원래 77명이었지만, 2014년 “정부와 정당 대표가 3분의 1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연방헌법재판소의 권고에 따라 정당 대표 12명과 연방정부 몫 3명을 2명으로 줄여 모두 60명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실제 독일 방송평의회는 주 정부·연방정부 대표를 비롯해 지역·종교계·노동계·사회단체·언론계는 물론이고, 추방자 연합·스탈린 희생자·이민자·성 소수자 대표까지 포함하고 있다.
혹시 정치권 몫을 줄이고 추천 단체를 늘렸다는 점에서 독일 방송평의회 모델과 유사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수가 턱없이 적다. 불과 10여 개 단체가 추천하는 20여 명의 이사로 다원화된 사회의 영역별 대표성을 모두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분야별 대표를 일일이 법으로 정하는 독일 제도 역시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개정안에 포함된 추천 단체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다양성을 담보하고 있는가도 의문이다. 분야별 다양성보다는 같은 정치 성향을 보여온 단체들이라는 공통점이 먼저 눈에 띈다. 정치적 잣대를 가지고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독일 방송평의회 구성 방식에 비추어 봐도 야당 개정안에 포함된 단체들은 전혀 다원적이지 않다. 국회 추천 몫을 뺀 방송·언론학계, 방송 직능 단체들이 모두 언론·방송 관련 단체들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방송의, 방송을 위한, 방송에 의한 기구’다. 더구나 독일 방송평의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방송·언론학회 추천 인사가 무려 6명이나 된다. 한마디로 ‘비례의 원칙’이 완전히 실종되었다. 결국 야당 방송법 개정안의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 방식은 사회적 다양성이나 다원적 규제를 목적으로 하는 독일의 공영방송 거버넌스와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다수의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는 규제 효율성이나 실효성 측면에서 취약하기 마련이다. 60명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된 독일 방송평의회는 주기적으로 모여 방송 방향 설정·편성 정책 같은 사안들만 의결한다. 얼핏 공영방송 이사회·시청자위원회·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역할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는 총괄 규제·감독기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엄밀히 보면 공영방송 이사회와 시청자위원회의 중간 형태쯤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독일 공영방송의 실질적 규제 기구는 주 정부 총리위원회 추천 5인·연방정부 추천 1인·방송평의회 추천 8인으로 구성된 상설 운영위원회다. 운영위원회는 공영방송 경영과 관련된 업무들을 의결하고 사장을 상시 감독하고 있다. 사회 대표성이 강한 방송평의회의 단점을 운영위원회가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야당의 방송법처럼 실질적 규제·감독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 수를 늘려 명목적 대표성만 강화하게 되면 책임 없는 명사 기구 혹은 정치적 거수기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지금도 KBS 이사회와 MBC 방송문화진흥회의 감독·규율 능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많다. 여기에 사회 대표성이란 명분으로 공영방송 이사회를 형해화시키면 지금보다 더 무기력한 정치 기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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