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 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진짜 김일성은 누구인가
8·15광복 후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소 양대국의 신탁통치를 받는 등 혼란스러웠던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3대째 김씨 가문의 독재가 이어지도록 한 김일성. 본명이 김성주인 그는 어째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도용한 것일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진짜 김일성 장군은 누구인가. 지금부터 가짜 김일성이 도용한 진짜 김일성의 얘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김광서=김경천=김일성 장군
진짜 김일성, 그분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이고 별호는 김경천(金擎天)이다. 그는 1888년 6월5일 함경남도 북청군 해안(海晏) 승평(昇坪)에서 부친 김정우와 모친 윤옥연의 5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호적상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66번지이다(지금은 그곳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김경천(김광서)의 아버지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며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있었던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경응의숙(게이오기주쿠대학)·동경고등공업학교(도쿄공업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일본 유학파 출신의 조선 육군 최고위층 인사였다. 그런 아버지를 두었으니 김경천은 한마디로 금수저 출신이었던 것이다.
8살 무렵 가족을 따라 서울 사직동으로 이주한 그는 15살에 당대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으로 꼽히던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 부설 고등학교를 거쳐 19살에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1911년에 기병과 제23기생으로 졸업했다. 이때 그는 최우등 성적으로 전 과정을 마쳤는데 당시 조선 사람은 일본 천황의 허락이 있어야 입학할 수 있었던 일본육군사관학교를 그렇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을 보면 그가 보통 이상의 수재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육사 출신 한인들은 김광서 외에도 제26기생 홍사익(洪思翊)과 이응준(李應俊)등 13명과 제27기생 김석원(金錫源)과 김인욱(金仁旭) 등 20명이 있었다.
김경천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무렵 부호인 유계준의 딸 유정화와 결혼했는데 그는 이때 부인에게 피아노를 사 주고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후 유학 도중 부인을 일본으로 불러 함께 살며 두 딸 지리(知利)와 지혜(智慧)를 낳았다.
사관학교 졸업 후 1915년에는 기병 중위가 되어 근무하던 중 1919년 2월20일에 병가를 얻어 서울 사직동 166번지 자택에 와 있는 동안 3·1운동을 맞았다. 이때 그는 일본군을 떠나 해외로 도피해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그해 6월에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지대형(다른 이름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만주로 탈출했다.
이들은 요녕성 고산자(孤山子)에 이시영(李始榮)이 설립한 한인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이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구한 말에 정위(正尉·오늘날의 대위)를 지낸 신팔균(申八均)도 교관으로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의 장교 출신 교관들은 다같이 ‘천(天)’ 자 돌림의 별호를 갖기로 하고 신팔균은 신동천(申東天)으로, 김광서는 김경천(金擎天)으로, 지대형은 지청천(池靑天·또는 모성을 따라 이청천)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국 독립투쟁사의 별, 남만삼천(南滿三天)
신동천·김경천·지청천 이름의 끝 자가 모두 ‘천(天)’인 이 세 사람을 일컬어 한국독립투쟁사에서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 부른다. 같은 해에 중국 본토에서 운남사관학교를 졸업한 이범석(李範奭)도 이들 ‘남만삼천(南滿三天)’과 합류했다.
세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위인 신동천은 1882년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에 육군 참위(오늘날의 소위)로 임관한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1909년에 대동천년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만주로 옮겨 가 신흥무관학교 교관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군을 양성했고 ‘대한통의부 의용군’의 사령관 겸 군사위원장이 되어 무력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당시 만주 지역 독립군의 활동으로 골머리를 앓던 일제는 만주의 마적단을 매수해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는데 신팔균은 이때 마적의 기습 공격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김경천과 동갑내기이자 일본 육사 3년 후배인 지청천은 배재학당과 육군무관학교를 거쳐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한 후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19년 김경천과 함께 탈영해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된 그는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일·김좌진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이후 소련 이르쿠츠크로 이동해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다가 소련 당국에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30년대 초 한국독립군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지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엔 귀국해 최고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이 되었고 6·25 전쟁 시에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김경천
김경천은 1919년 겨울에 무기 구입 차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에도 한족 이민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만주의 간도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당시는 볼셰비키 혁명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 군대의 한인들에 대한 잔학 행위가 극심했다. 그래서 김경천은 그곳에서 항일 무력투쟁 조직을 만들어 선두에 나섰다. 그리고 그때 김경천이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이 소문으로 국내에 전해지면서 항일투쟁의 영웅적인 존재로 흰 말을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날아다니는 일본육사 출신 김일성(金日成) 장군의 신비로운 얘기가 널리 퍼졌다. 그가 ‘김광서’란 이름으로 인터뷰한 기사가 1923년 7월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항일 투쟁에서 김경천(김광서·김일성)은 볼셰비키 군대와 동맹 관계에 있었으나 1922년 가을에 일본 군대가 철수하자 시베리아를 장악한 볼셰비키는 그를 배신하고 한인 독립군 부대들을 볼셰비키 군대에 편입시키거나 무장해제시켰다. 1925년 6월25일자 동아일보에 ‘김광서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항일 투쟁을 또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그것이 김경천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제 진실을 말하자
북한 김일성의 역사 날조와 신분 위장은 철저한 것 같으면서도 엉성하다. 그가 보천보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당시에는 사용하지도 않았던 장군이란 군사 칭호를 사용했으며 만주 산악지대에서 싸웠다는 그가 흰 말을 타고 유격대를 지휘했다는 주장은 만화책 수준의 웃기는 거짓말이다.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백마를 탄 항일투사 김일성의 그림이 걸려 있으며 김일성 전기에는 그 그림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백마를 탄 김일성 장군’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김광서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며 ‘보천보 전투’의 얘기는 동북항일연군 제6사단장 김일성(그것도 가짜 김일성)의 얘기를 도용하여 미화한 것이다.
그 외에도 ‘영웅 김일성 장군’ ‘조선민족해방투쟁사’ ‘김일성 장군 약전’ ‘조선근대혁명운동사’ ‘역사사전’ ‘조선전사’ 등의 북한 서적들에는 역사 날조·변조·도용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신분의 위장과 도용이요, 김일성이 조직하고 지휘했다는 사실무근의 조선인민혁명군 얘기와 그가 지휘했다는 보천보 전투의 이야기는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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