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6-09-28 21:50
뉴스 > 연재기획
CIA와 대한민국 [49] 魔王 김정일의 민낯 ②
조국을 사랑한 마이클 이의 美CIA 40년 생생한 증언
마이클 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2 06:30:20
 
▲ 마이클 이(Michael P. Yi) 박사
 
[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김정일을 지배한 환경적 우월감
 
광고
존재적 열등감 못지않게 김정일의 삶을 지배한 것은 환경적 우월감이었다. 그는 평생을 아버지 김일성의 절대 권력의 그늘에서 살았으며 30대 초반에 권력의 후계자로 책봉됐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환경에서 지나칠 정도로 우월감에 도취되어 설치고 다니는 동안 그의 겁 없고 불가능을 모르는 정신세계가 형성되었다. 그의 권력 승계에 대해 반대와 도전이 있었지만 모두 폭력으로 제압했고 정적들을 숙청하면서 자신감이 더해져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입지를 굳혀 갔다.
 
그러나 권력으로 조성된 그의 환경적 우월감은 쓴 약을 달콤한 껍질로 감싼 당의정과 같은 것이어서 그 속에는 항상 숙명적인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그는 생애 최대의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상한 것이 소위 ‘선군정치(先軍政治)’라는 것이었다.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 김일성과 당 지도부는 대남정책에서 경제적 실리를 우선으로 하는 유화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김정일과 군부는 그와 반대로 조국 통일은 오직 무력과 대남 적화 공작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강경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에 부자간에 갈등이 있었는데 김일성이 죽자마자 당의 일각에서는 김정일 거부 운동과 김평일 옹립 운동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재빨리 군부와 손을 잡고 당을 견제했으며 최고정책협의 기구인 당의 정치위원회를 국방위원회의 시녀로 만들고 인민군 총참모부 내에 보위사령부를 신설해 역사에 유례가 없는 강력한 폭압정치와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그 후 북한에서는 매년 약 300명의 체제 도전 세력을 공개 처형했다.
 
실력을 갖춘 보통 우월감의 소유자들은 대담하고 관대하다. 그러나 실력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환경적 우월감의 소유자들은 편협하고 비겁하고 잔인하다. 그것이 그들에겐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김정일과 그의 추종자들이 취한 모든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의 추종자들은 그를 ‘대범하고 통이 큰 지도자’라고 추앙하며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로 호통을 치는 ‘희대의 위대한 전략가’라고 떠벌였다.
 
이복형제들과의 갈등
 
계모인 김성애가 낳은 이복형제들은 부계우성(父系優性)으로 인품이나 외모가 아버지 김일성 쪽을 닮아서 준수해 삼촌 김영주를 비록해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더 받았다. 그래서 김정일은 늘 경계심과 자기방어의 심리 속에 살게 됐다. 그는 아버지 김일성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으며 충성을 다했다.
 
자라면서 그는 총애와 관심을 받기 위한 최고의 무기는 아버지 김일성의 필생의 꿈인 한반도 적화 통일과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계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홍위병과 유사한 ‘사회주의 혁명 소조’를 조직해 전국을 설치고 다녔고, 대남공작을 강화해 남한을 파괴하고 방해하기 위한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 아웅산 사건과 KAL 858기 폭파 사건이 다 그가 저지른 일들이었다.
 
 
 
▲ 북한 조선중앙TV가 2007년 6월 방영한 기록영화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 김정일과 여동생 김경희의 모습. 김정일은 여동생 김경희에 대해 애틋하고 깊은 혈육의 정을 품고 있었다. 연합뉴스 DB
 
1974년에 노동당이 공식적으로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책봉한 이후에도 그의 불안과 경계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들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곁가지’라고 해서 그들을 중앙 요직에 배치하지 않고 항상 한직으로 내몰았고 심지어 외국으로 내보내 국내에서의 권력 구축 기회를 차단했다. 김성애 소생의 평일은 폴란드·체코 등지의 대사로 나갔고, 영일은 독일 주재 대표부의 과학참사로 있다가 1999년에 당뇨병으로 죽고 딸 경진은 주 오스트리아 대사 김광섭의 아내로 비엔나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늘 숨은 눈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당 정치국 일부에서는 후계자로 성격이 거칠고 오만불손한 김정일보다는 외모도 준수하며 성격이 원만한 김평일을 옹립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그런 바람을 차단한 사람이 2003년 10월26일에 사망한 대남사업담당 당 비서 김용순이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과 김용순이 밀착되었던 이유도 다 그런 데에 있었다.
 
당시 김성애와 그 소생들은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살았으며 김성애는 생활비도 대주지 않아 한동안 고생을 했다. 김평일은 사람이 원만하고 미남이며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인물이나 비운의 일생을 살아야 했다. 숙부 김영주의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김성애와 그의 소생들은 참으로 어떤 비참한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위기 극복
 
김정일은 “대를 이어 혁명을 완수하자”는 김일성의 뜻에 따라 당이 공식으로 인정한 권력 후계자로 어느 정도 검증된 리더십은 갖추고 있었지만 아버지 김일성과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다. 그래서 권력 세습을 반대한 원로들이 숙청되고 빨치산 1세대가 죽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간 후에 당과 군부 요직에는 장성택·연형묵·조명록 등 김정일 추종 세력이 포진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당의 일부에선 김평일 옹립의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중앙당에서 김정일 거부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당황하여 재빨리 군부와 손을 잡고 당의 세력을 제압할 만한 선군 정치의 구도를 짜기 시작했다.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은 당을 경원시했으며 최고 정책기구인 정치국까지도 무시하고 국가 운영의 방향을 군 중심으로 돌렸다. 자신을 배신한 중앙당도 믿지 못했고 청진의 6군단 반란 사건에 가담한 국가안전보위부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군정치를 보강하기 위해 인민군 총정치국 내 일개 국에 지나지 않았던 보위국을 보위사령부로 승격 재편하고 보위사령부에 군부와 민간인을 모두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중앙당과 국가안전보위부 내부의 소위 불순분자, 즉 반(反) 김정일 세력을 색출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결국 보위사령부가 김정일을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그 후 헌법이 개정되고 국가 최고 정책기구로서 국방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당의 정치국은 그 후 아무 실권을 갖지 못했다. 그 후 북한에서는 ‘당 중앙’이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며 김정일에 대해 ‘위대한 장군님’ ‘국방위원장’이란 호칭을 쓰게 했다. 당은 군부의 시녀로 전락해 버렸다.
 
김정일의 집무 스타일
 
김정일은 한때 매제 장성택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셨고 기쁨조 파티 같은 데서 폭음을 해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또한 과로로 간과 심장이 나빠져 독일과 소련 같은 데서 외국 의사들이 평양을 드나든 일이 있었다. 그들은 김정일의 몸이 나이보다 10년이 더 늙었다고 경고를 했다.
 
김정일은 야행성 체질이라 낮보다 밤에 일을 더 많이 했는데 때로는 그의 집무실에 새벽 3∼4시까지 불이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사망 후 음주량을 줄이고 집무 시간도 축소해서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지만 야행성 집무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집무 스타일의 패턴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는 보기보다 세심해서 올라오는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중요하고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소위 친필 지시를 내렸다. 그의 업무처리 방식은 ‘위임·승인·친필 지시’의 3단계로 구분되었다. ‘위임’은 업무의 성격에 따라 전담이나 협조할 부처를 지정하여 재량껏 처리하라는 지시이고, ‘승인’은 보고한 계획대로 처리해도 좋다는 지시, ‘친필 지시’는 자신의 견해와 방법을 제시하며 특별히 비중 있게 처리해 달라는 당부를 곁들인 지시를 말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이 친필 지시를 남발하는 바람에 중앙당에서는 그를 ‘마이크로 매니저’라 부르며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후원하기
  • 정기 후원
  • 일반 후원
  •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 스카이데일리는 공공성에 기반해 독자가 만들어 가는 언론을 지향합니다. 정기 또는 일반 후원시 맞춤형 뉴스, 독자에게 할당하는 지면 서비스, 동행하는 홍보, 유상증자시 참여기회 제공(법인에 한함)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1
좋아요
1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
방문수(PC&모바일)
오늘(실시간) 138,692 ▶
어제 140,329 ▶
최근 7일 ▶
대한민국 명사들
대면 기회를 가져보세요.
팬클럽 가기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시 서초구 방배천로2안길 82(방배동 463-18) 청송빌딩 3,4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종합일간지 등록번호 : 서울시 가50131,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민경두, 편집국장 : 주경준, 사업자 번호 : 214-88-81099 후원계좌 : 158-910019-39504(하나은행)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진강
본지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의 서약사로서 신문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