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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와 대한민국 [51] 김정일의 권력 투쟁
조국을 사랑한 마이클 이의 美CIA 40년 생생한 증언
마이클 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6 06:30:20
 
▲ 마이클 이(Michael P. Yi) 박사
[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이복동생 김평일
 
아버지 김일성이 세상을 뜨자 김정일에겐 평소에 예상했던 대로 이복동생 김평일이 ‘넘어야 할 산’으로 다가왔다. 1954년생인 이복동생 김평일은 아버지를 닮아서 외모가 준수하며 성품도 너그럽고 원만했다. 그래서 숙부 김영주를 비롯한 빨치산 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으며 심심치 않게 권력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그들은 김평일을 보면 김일성의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며 아주 좋아했다.
 
평양 남산 고급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닐 때 김평일의 성적은 같은 학교 출신인 형 김정일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일반 학과는 물론 도덕·예술·체육 등에서도 그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 학교 졸업생과 교사들은 언제나 김평일을 김정일보다 높이 평가했고 그가 당연히 김일성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사실을 감지한 김정일이 남산 고등학교의 모든 학사기록을 없애기 위해 사람을 시켜 그 학교를 폭파시킨 일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김정일의 살생부
 
김정일이 당시 세상에서 가장 없어졌으면 했던 인물은 누가 뭐래도 이복동생 김평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살생부 첫 페이지에는 남일과 오진우도 들어 있었다.
 
남일은 김일성보다 2살 아래인 1914년생으로 타시켄트 사범대를 나와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고 1942년에는 육군 대위가 되었다. 1945년에 스탈린의 밀명을 받고 김일성을 돕기 위해 평양에 왔으며 건국 초기에 외무상을 지냈고 1953년 휴전협정에서 인민군 대장으로 북한 측을 대표하여 휴전협정에 조인한 사람이다. 그는 그후 당 정치국 위원·부수상 등의 요직을 거쳐 1972년도에는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남일도 김정일의 권력 승계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그가 소련의 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자였기 때문에 모스크바를 의식해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76년 3월 초 남일 부총리가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석유화학공장 건설을 시찰하러 갔을 때, 좁은 비포장도로에 갑자기 대형 트럭이 나타나 남일이 탄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남일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1976년 3월7일 노동신문에 ‘남일 부총리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이라는 짧은 기사를 남기고 김정일의 살생부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이 사건 바로 직후 김정일은 당시 절대 추종자의 한 사람인 인민군 총정치국장 이용무 대장에게 지시해 인민무력부 총참모장 오진우를 감시하며 비리를 적발하여 남일과 같은 운명을 맞게 하자고 했다. 김정일이 오진우를 특별히 경계했던 이유는 그가 아버지 김일성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빨치산 1세대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며, 김정일을 늘 어린애 취급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그를 항상 자신 앞에 놓인 거대한 장애물로 여겼다. 오진우가 김성애와 그녀의 동생 김성갑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김평일의 강력한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김정일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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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 전 체코 주재 북한대사. 숙부 김영주를 비롯해 남일·오진우 등 빨치산 1세대 원로들의 지지를 받는 그가 김정일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김평일의 뒷배 오진우
 
1976년 5월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하자 김정일은 이용무를 앞세워 오진우 압박 공작에 들어갔다. 이용무는 총정치국장의 권한으로 전군의 막사와 사무실 김일성 초상화 바로 옆에 김정일의 초상화를 걸게 했고 김정일 관계 출판물을 대대적으로 보급해 전군이 학습하게 했다. 그 공으로 이용무는 1974년 6월에 당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기고만장한 이용무가 군부 내에서 월권 행동을 많이 하자 오진우가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진언해 해직시켰다. 그러자 김정일은 곧바로 박충국을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밀어 넣었다. 박충국은 김정일과 장성택의 술 친구였다. 박충국은 오진우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했다가 발각되어 해직되었지만 얼마 안 있어 쿠바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나갔다.
  
오진우와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1976년 6월 당 정치위원회에서 빨치산 1세대들이 당의 질서와 규율을 파괴하고 1세대 간부들을 일선에서 퇴진시키려는 김정일의 행동을 공개 비판했다. 이때 비판을 주도한 김동규는 결국 정치범 수용소로 갔고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 기반 구축 작업을 계속했다.
 
오진우 대신 오극렬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젊은 세대 60만 명을 새로 노동당에 입당시켰다. 그는 1979년에 오진우의 동의 없이 48세의 오극렬을 인민군 총참모장의 자리에 앉혔다. 오극렬은 김정일의 만경대 혁명유자녀학원 동기이며 빨치산 2세대를 대표하는 군인이다. 그는 공군 출신으로 소련 공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고 영어·러시아어·중국어에 능통했으며 탁월한 군사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매사를 상관인 오진우보다 김정일에게 먼저 보고했다. 그래서 김정일과 오진우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한 마리 늙은 소
 
그러다가 김정일은 오진우와의 싸움에서 전략을 바꿨다. 군부 내에 “머지않아 오극렬이 오진우를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이 될 것”이란 풍문을 유포시켜 오진우를 극도로 초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오진우가 퇴근해서 집에 가 보니까 마당에 전에 없던 자동차 두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미제 포드 자동차와 독일제 벤츠450 자동차였다. 오진우의 아내가 신이 나서 얘기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 주신 선물이랍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에 김정일은 오진우에게 호화주택을 지어 주었고 기쁨조 비밀파티에 꼬박꼬박 초대했다. 이렇게 해서 오진우는 “어린 목동이 고삐를 끌고 가는 한 마리의 늙은 소”가 되었다. 기쁨조 파티에서는 오진우가 가장 나이 많은 손님이었는데 항상 여러 사람이 권하는 술에 만취해서 집에 돌아가곤 했다.
 
오진우의 교통사고와 복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1987년 봄, 밤늦게까지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만취한 오진우가 직접 차를 몰고 집에 가다가 가로등을 들이받고 중상을 입었다. 새벽에 그를 발견해 병원에 옮겼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부상이 심각했다. 두개골이 깨지고 갈비뼈도 여러 대 부러져 국내에서 치료가 가능할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김일성은 자신의 전용기로 마취 상태의 오진우를 모스크바로 보냈고 모스크바에선 그를 다시 동독으로 보내 수개월간의 치료 끝에 회복시켰다. 만취한 71세의 노인에게 밤길에 경호원도 없이 직접 차를 몰게 해서 집에 보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이 교통사고의 이면에 그를 해치기 위한 고의성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따질 길은 없다.
 
오진우가 없는 동안 김정일은 오극렬에게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장 직무대행을 하게 했다. 이 짧은 기간에 오극렬의 리더십이 인민군 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작전 지휘관들을 비롯해 모두 그가 계속해서 인민무력부장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주장은 군대는 전투지휘관이 지휘해야지 정치 군관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재기불능으로 믿었던 오진우가 목발을 짚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오진우는 자신이 없는 동안 인민군 내부의 상황이 많이 변해 있음을 발견하고 오극렬의 실책을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당의 권위와 정책을 무시하고 정치 군관들의 활동을 제한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정일의 의도와는 달리 오진우가 다시 인민무력부장의 자리에 복귀하고 오극렬은 한직인 민방위사령관으로 좌천됐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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